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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배달 김언 - 지나간 것들의 따뜻한 속삭임 | 조용우「세컨드핸드」
세컨드핸드 조용우 시장에서 오래된 코트를 사 입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른 나라 말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누런 종이에 검고 반듯한 글씨가 여전히 선명했고 양파 다섯, 감자 작은 것으로, 밀가루, 오일(가장 싼 것), 달걀 한 판, 사과주스, 요 거트, 구름, 구름들 이라고 친구는 읽어 줬다 코트가 죽은 이의 것일지도 모른다며 모르는 사람의 옷은 꺼림칙하다고도 했다 먹고사는 일은 어디든 비슷하구나 하고 웃으며 구름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구름은 그냥 구름이라고 친구는 답했다 돌아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 오래전에 사려고 했던 것들을 입으로 외워 가면서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따뜻한 코트를 버려두고 이 모든 것을 살뜰히 접어 여기 안쪽에 넣어 두고 왜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닌 것일까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시장을 통과할 때 상점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하나씩 바구니에 담아 넣을 수 있다 부엌 식탁에 앉아 시큼하기만 한 요거트를 맛있게 떠먹을 수도 있다 오늘 저녁식사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놀라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면서 구름들 바깥에서 이곳을 무르게 둘러싸고서 매일 단지 다른 구름으로 떠오는 그러한 것들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지나쳐 걷는다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오고 있다 - 시집 『세컨드핸드』(민음사, 2023)
작성일 2025-03-06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0상세보기 -
시배달 김언 - 나는 단골이고 싶지 않아서 | 조해주 「단골」
단골 조해주 내가 다니는 회사는 종로에 있고 근처에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나는 단골이 되고 싶지 않아서 어떤 날은 안경을 쓰고 어떤 날은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어떤 날은 혼자 어떤 날은 둘이 어떤 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나오는데 어떻게 차갑게, 맞지요? 주인은 어느 날 내게 말을 건다 커피를 받아들고 나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저어서 드세요, 빨대의 끝이 좌우로 움직이고 덜컥 문이 잠기듯 컵 안에 든 얼음의 위치가 조금 어긋난다 주인은 내가 다니는 회사 맨 꼭대기 층에 지인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혹시 김지현이라고 아나요? 나는 그런 이름이 너무 많다고 대답한다 그렇구나, 주인은 얼음을 깨물어 먹고 설탕처럼 쏟아지는 창밖의 불빛들 참, 내일은 어떻게 하면 처음 온 사람처럼 보일까 생각하면서 - 시집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아침달, 2019)
작성일 2025-02-06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77상세보기 -
시배달 김언 - 이자켓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복어 가요」
복어 가요 이자켓 합정까지 걸을까? 추운데 목도리 빌려줄게 너는? 난 추위 잘 안 타 추워서 머리가 멈췄나 봐 겨울이라 그런가 차디찬 골짜기인 거야 그곳에 도달한 생각들은 모두 얼어붙는 거지 그 골짜기 다 녹여주고 싶다 그럼 범람할 거야 아무 말이나 쏟아져 나올 거야 그건 안 돼 왜? 저거 들려? 뭐? 구세군 종소리 연말이긴 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뭐 해? 요즘 살쪘나 봐 패딩 탓인가 나 부해 보여? 조금 떨어진 채 빗물 언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한적한 합정에는 이 거리 끝에도 저 거리 끝에도 담배 태울 곳이 없어서 ‘그런지’라는 카페를 지나고 솔방울식당 지나고 푸르게 칠한 건물과 목련이 자라는 주택 지나 어둑한 골목에 들어섰다 불을 붙이고, 신발 뒤축으로 얼어버린 물웅덩이를 부수었다 얼음 조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다 맥없이 나뒹굴었다 종소리가 한 번, 두 번 이편저편 맴돌았다 10번 출구가 보였다 목도리를 돌려받았다 조심히 가 너도······ 넌 뒤돌아보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매끄럽게 사라졌다 점점 작아지는 뒤통수를 보다 돌아섰다 코트 주머니에는 킹 크룰의 앨범이 들어 있었고 움켜쥔 목도리는 방어 태세의 복어만큼 부풀어 올랐다 - 시집 『거침없이 내성적인』(문학과지성사, 2023)
작성일 2025-01-09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87상세보기 -
시배달 김언 - 마윤지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동지」
동지(冬至) 마윤지 12월에는 흐린 날이 하루도 없으면 좋겠다 그런 약속이 있으면 좋겠다 놀이터엔 애들도 많고 개들도 많으면 좋겠다 살도 안 찌고 잠도 일찍 들면 좋겠다 조금 헷갈려도 책은 읽고 싶으면 좋겠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차표를 잔뜩 사고 안 아프면 좋겠다 30만 년 전부터 내린 눈이 쌓이고 눈의 타임캡슐 매일의 타임캡슐 다 흘러가고 그게 우리인가 보다 짐작하는 날들이 슬프지 않으면 좋겠다 묻어 놓는 건 숨기는 게 아니라 늘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지 그 무엇보다 많이 만져 보는 거지 나중엔 번쩍 번개가 되는 거지 오렌지색 같은 하늘이 된다 맛도 향기도 손가락이 열 개인 털장갑 이를테면 깍지 햇빛의 다른 말이다 - 시집 『개구리극장』(민음사, 2024)
작성일 2024-12-12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09상세보기 -
시배달 김언 - 허꽃분홍 배우의 목소리로 듣는 최지은 시인의 「가정」
가정 최지은 우리는 말이 없다 낳은 사람은 그럴 수 있지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도 그럴 수 있지 우리는 동생을 나눠 가진 사이니까 그럴 수 있지 저녁상 앞에서 생각한다 죽은 이를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한 사람이 완성된다 싹이 오른 감자였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푸른 감자 엄마는 그것으로 된장을 끓이고 우리는 빗소리를 씹으며 감자를 삼키고 이 비는 계절을 쉽게 끝내려 한다 커튼처럼 출렁이는 바닥 주인을 모르는 손톱을 주웠다 나는 몰래 그것을 서랍 안에 넣는다 서랍장 뒤로 넘어가버린 것들을 생각하면서 서랍을 열면 사진 속의 동생이 웃고 있다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다 환한 햇살이 완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우리가 눈 감으면 우리를 보러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 있었다 -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창비, 2021)
작성일 2024-11-1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25상세보기 -
시배달 김언 - 조성래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창원」
창원 조성래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단 도착하면 나는 그곳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다 먼 곳은 먼 곳으로 남겨 두기 위하여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속속들이 모든 먼 곳을 다 알고 모든 먼 곳을 파악하고 모든 먼 것들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전지하신 하느님께 합장하고 기도 올리는 성모마리아······ 파티마 병원에 어머니는 누워 계셨다 빗자루에 환자복을 입혀 놓은 것처럼 바싹 말라서 아직 살아 계셨다 내 손을 잡고 울다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다 조금 뒤면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하나도 밉지 않은 듯이, 어제도 날 본 사람처럼 웃었다 다음 생에는 안 싸우고 안 아픈 곳에서 함께 있자고 이제 당신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하겠다고 당신도 당해 보라고 눈물이 끝 모르고 흘렀다 눈물 흘릴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식 된 사람인 것처럼······ 그 시각 모든 일이 먼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선 엄마도 죽고 나도 죽고 끔찍한 날 피해 자리를 비킨 동생도 죽고 모두 죽어서 죽고 나서 웃고 있었다 모두 지난 일이라는 듯 모두 지나야 했던 일이라는 듯······ 그러나 그건 나 혼자서 듣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홀로 죽을 것이며 나는 여전히 어떤 현실들에 마비된 채 살아도 되는 사람처럼 살아서 살아 있는 것 같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닐 것이다 —시집 『천국어사전』(타이피스트, 2024)
작성일 2024-10-11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4 조회수 1188상세보기 -
시배달 김언 - 이린아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양동이」
양동이 이린아 그해 여름 양동이 속에 머리를 넣고 살았다 양동이는 늘 밖에서부터 우그러진다 우그러진 노래로 양동이를 펴려 했다 그때 나는 관객이 없는 가수가 되거나 음역을 갖지 못한 악기의 연주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잘 보세요, 얼굴에서 귀는 유일하게 찌그러진 곳입니다 보컬 레슨 선생이 말했다 가끔 내 목소리가 내 귀를 협박하곤 했다 세모 눈썹, 불타버린 미간을 펴며 귓속과 목구멍의 구조를 샅샅이 뒤지는 소리를 내려 했던 여름 노래, 그해 여름에 배운 노래는 반팔이었고 샌들을 신었고 목덜미에 축축한 바람이 감기는 그런 노래였다 양동이 속에서 노래는 챙이 넓은 모자를 뒤집어쓰곤 했다 골똘한 눈, 꺾인 손등으로 받치고 있는 청진의 귀를 향해 벌거벗은 노래를 불렀다 양동이 속에서 듣던 1인용 노래 허밍과 메아리의 가사로 된 노래를 우그러진 모자처럼 쓰고 다녔다 - 시집 『내 사랑을 시작한다』 (문학과지정사, 2023)
작성일 2024-09-12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47상세보기 -
시배달 김언 - 남지은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남지은 일곱 살처럼 살라고 엄마는 말하고 뭐든지 서서히 하라고 아빠는 말한다 삼 년 안에는 첫 시집을 내야지 선배가 조언하고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중요해요 치료사가 당부한다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은 어떻게 다를까 언니가 혼잣말처럼 물어오고 시를 몇 편 쓰면 시인이 되나요 시인은 시만 쓰나요 시가 아니면 안 되나요 글쓰기 수업 학생들이 열띠게 질문한다 덜 핀 작약을 안아든 귀갓길 울 데가 필요해서 찾아왔다고 뵌 적 없는 시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니 여기까지 잘 왔네, 하신다* 사랑 많은 손을 붙들고 나는 여기 무어든 받아 적는다 포장을 끄르면 사라질 신비 같은 * 2020년 10월 3일 허수경 시인의 2주기 추모제를 지내고 북한산을 내려오는 길에 김민정 시인이 건네준 말. “수경 언니는 틀림없이 지은에게 이렇게 대답했을 거다. 여기까지 잘 왔다고.” 시의 제목은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에서 가져왔다. 『그림 없는 그림책』 (문학동네, 2024)
작성일 2024-08-08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69상세보기 -
시배달 김언 - 숙희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봬요」
봬요 숙희 내일 봬요 그래요 내일 봬요를 처리하지 못해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내일 뵈요 라고 썼다가 그건 또 영 내키지가 않아 그럼 내일 뵐게요 라고 적어보니 다소 건방진 듯해서 이내 그때 뵙겠습니다 라고 고치자 너무 거리를 두는 것 같고 내일 봐요에 느낌표를 붙였다가 떼었다가 두 개를 붙였다가 떼었다가 갈팡질팡하는데 가벼운 인사를 가벼운 사람으로 당신이 나를 오해할까 잠시 망설이다 숨을 고르고 다시 봬요로 돌아온다 그런데 봬요를 못 알아보고 세상에 이렇게 한글을 이상하게 조합하는 사람도 있네 라고 하면 어쩌지 아니면 봬요는 청유형 존대어라 어색한 걸 모르냐고 되물을까 봐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다 싶어져 내일 봅시다 라고 따따따 찍어보니 참나 이건 정말로 더 아니다 싶어 결국 내일이 기다려져요 라고 보내버리고는 손목에 힘이 풀려 폰을 툭 떨어뜨렸다 『오로라 콜』(아침달, 2024)
작성일 2024-07-1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379상세보기 -
시배달 김언 - 강우근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환한 집」
환한 집 강우근 나의 어린 조카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다. 누나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너의 그 칙칙함을, 무표정을 좋아해” 가족 모임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만화에 나오는 부기라는 옆집 아저씨를 닮았다고 많은 것을 무서워해 바깥을 안 나가는 부기 아저씨를 소피라는 꼬마가 매번 불러내어 모험이 시작된다고 나는 그런 조카를 하루 맡아주기로 하고 “나는 하얀 집에 살고 싶어” 조카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에 그린 집을 꺼낸다. 여름에는 태풍이 오고, 가을에는 은행이 터져 나가고, 겨울에는 폭설이 떨어질 텐데. 하얀 집은 금세 검어질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놓인 생크림 케이크는 작아질수록 포크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다. “삼촌은 어떤 집에 살고 싶어?” 나는 검은 집이라는 말을 삼키고 환한 집이라고 대답하며 애써 웃는다. 조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고 환한 집은 어떤 집일까, 생각에 잠기는 사이 생크림 케이크에는 검은 파리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나는 서둘러 케이크를 치우고 조카가 돌아온 테이블에는 새롭게 놓인 생크림 케이크 “······삼촌이 배가 고파서” “삼촌에게 추천해 줄 케이크의 맛이 아주 많아.” 환한 빛이 우리를 비추는 동안 우리는 생크림 케이크를 아무런 근심 없이 나눠 먹는다. 『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작성일 2024-06-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285상세보기 -
시배달 이수명 - 김소연의 「내리는 비 숨겨주기」를 배달하며작성일 2023-12-2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5639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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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배달 이수명 - 황인찬의 「겨울빛」을 배달하며작성일 2023-12-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928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