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소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소설 장진영 - 럭키
럭키 장진영 냉동실을 여니 증거물 봉투가 보였다. 질기고 불투명한 봉투 안에 핫도그가 아주 많이 들어 있었다. 얼굴로 냉기를 받으며 잠시 멈추었다. 증거물9: 핫도그(아주 많은). “여자친구가 핫도그 백 개 사 줬어.” 운석 오빠가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샤워한 참인지 한 손에 수건을 들었고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핫도그 싫어하는데. 너 좀 가져갈래?” 운석 오빠는 몸이 더 불어 있었다. 2미터 가까운 키에 지진이 나도 안 부러질 것 같은 뼈에 엄청난 근육질이었는데 지방까지 붙어서 더 압도적이고 과다해 보였다. 상냥하지 못해 보였다. 솔직히 내가 환장하는 타입의 몸이었다. 구구절절 없이 단박에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몸. 나는 0.1초가량 운석 오빠의 팬티를 바라봤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상상했다. 마찬가지로 클까? 포경수술은 했을까? 그러다 혼자 사는 집에서 샤워하러 들어가는데 팬티를 챙기는 습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오기로 되어 있었으니 그랬겠지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 같았다.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경우에는 샤워할 때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않기까지 오래 걸렸다. 누가 알려 주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기 어려운 버릇인데 누가 알려 주려면 누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고··· 그러려면 이미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명하기 어렵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샤워하고 나갔을 때 단 한 순간도 밖에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단 한 순간도. 그러다 혼자 살게 되었다. 버릇은 오래 갔다. 버릇인 줄도 몰랐으니까. 깨달음의 순간은 계시처럼 찾아왔다. 알몸으로 나와 물기를 자연 건조시키는 건 어안이 벙벙할 만큼 기분 좋은 일이다. 습한 데서 땀 흘리며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특히 팬티는 최대한 늦게 입는 게 좋다. 운석 오빠에게도 알려 줄까 하다가 말았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편이 더 멋질 듯했다. “운석 오빠 뚱뚱해.” 대신 그렇게 말했다. “뒤룩뒤룩해.” “헬스 못 가서 더 뚱뚱해졌어.” 운석 오빠는 별로 기분 나빠 하지 않고 인정했다. “핫도그 먹고 그렇게 됐어?” “응. 너 핫도그 좀 가져가라.” 운석 오빠가 머리를 말리는 동안 나는 집 탐색을 이어 갔다. 사랑의 증거가 보관된 냉동실 문을 닫은 다음 그 아래 냉장 칸을 열어 보고, 싱크대 찬장을 열어 보고, 수저통을 열어 보고, 옷장을 열어 보고,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 봤다. 언젠가 운석 오빠가 말했던 것처럼 다 열어 봐야 속이 시원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었다. 신경은 이미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리로 가는 시간을 충분히 음미하고 싶었다. 배달 음식 박스를 발로 밀치며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못 보던 물건이 있었다. 전자피아노였다. KURZWEIL. “크루즈&mi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25상세보기 -
소설 박숲 - 위장의 기술
위장의 기술 박숲 상위 1%의 VVIP를 빛나게 해 줄 그림자. 그들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입가엔 잘 훈련된 미소가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번져 있다. 어떤 모욕에도 쉽게 흘러내리지 않을 견고한 미소. 나는 30대 커플 앞에 고급 포장지로 감싼 다쿠아즈와 하트를 띄운 바닐라라떼 두 잔을 내려놓았다. 행동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말투는 나긋나긋하지만 품위 있게, 걸음걸이는 조용하고 단정하게. 나는 고객 응대 매뉴얼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한 내게 ‘Very Very Important Person’이기 때문이다. 여자 고객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손가락을 펼쳐 잔을 들었다. 노동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손가락은 희고 가늘었다. 여자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왼쪽 손목에 찬 시계와 팔찌에서 빛이 눈부시게 흔들렸다. 그들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간단한 인사 외엔 말을 걸지 않았고 무례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건 품위나 예의 또는 친절의 종류라기보다 섞일 수 없는 계급의 분리를 의미했다. 은은한 빛이 대리석에 반사되어 라운지를 화려하게 감쌌다. 띄엄띄엄 놓인 테이블을 둘러보며 바 쪽으로 걸었다. 생상스의 〈백조〉의 선율이 우아하게 실내를 떠다녔다. 갑작스러운 생리통이 아랫배를 압박했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누르며 걸음을 빨리했다. 허 실장에게 전화가 왔다. 급하게 예약이 잡힌 고객이 있어서 30분 안에 제품을 공수해 오라는 지시였다. 각각의 명품관에서 공수해 올 제품 리스트를 문자로 넘겨받았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퍼스널 룸 고객의 명품 공수 기회가 오다니, 가슴이 떨렸다. 계약직 만료까지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시기에 좋은 징조였다. 재계약을 위해 허 실장의 입김은 절실했다. 선애 언니의 다이어리는 내 인생을 바꿔 줄 최선의 카드가 돼 줄 수 있을까. 어긋난 관계에 방부제가 필요하다고 한 건 선애 언니였다. 음식이나 음료도 아니고 ‘관계’라는 추상성에다 방부제라니. 방부제 종류가 뭐냐고 묻자 선애 언니는, 카무플라주라고 알아? 하고 되물었다. 모호한 표정을 짓는 내게, 위장이나 변장을 뜻하는 프랑스어라며 신상 스카프를 목에 두르듯 매끄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관계를 유지하려면 위장이 필수라는 얘기야? 사회적 가면이라고 해도 될 걸 꼭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야 신선하다는 건지.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직업 탓이라 이해했다. 어긋난 관계라도 있어? 많지. 누군데? 선애 언니는 청바지 지퍼를 올리고 셔츠 위에 블루종을 걸친 뒤 유니폼 구두를 하이힐로 갈아신고 클러치 백을 들었다. 모두 샤넬 제품이었다. 넌 아닌 건 확실해. 명품으로 치장하고 명품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탈의실에서 나간 선애 언니는 그날 이후 중환자실에 누워 정지된 생을 이어 가고 있다. 직원 전용 통로를 이용해 뛰다시피 명품관으로 갔다. VIP 고객들이 명품관마다 쇼핑을 하느라 어수선했다. 1층 중앙 통로에선 4인조 클래식 공연을 하고 있었다. 북적거리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95상세보기 -
소설 서민향 - 밤새 우는 사람들
밤새 우는 사람들 서민향 수화물 수취 구역은 해가 지듯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창들은 거울이 되어 그녀를 비췄다. 컨베이너 벨트는 움직임을 멈췄다. 전광판 속 SQ 611의 항공 편명도 사라졌다. 그녀의 캐리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입국 심사를 기다리다 구석으로 달려가 마신 술을 토했다. 사람들이 수군대며 그녀 곁에서 물러났다. 달려온 직원은 그녀의 상태를 보더니 구급차를 불러 드릴까요? 라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웅성거리며 그녀를 흘깃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사람들의 눈빛은 당혹감에서 점차 공포로 변했다. 구토로 샌들은 더러워져 있었고 사람들로 빽빽한 공간은 더웠다. 몸은 파도 위를 타듯 울렁였다. M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지만 M이 이곳에 왔을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M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까지도 그녀는 목에 난 상처 주위가 검푸른 멍으로 뒤덮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이틀 전, 그녀와 M은 그녀 집 부엌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오늘 예정된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상황에서 여행을 가는 건 무리라는 결론을 냈다. 그녀와 함께 일했던 팀장 리키가 자신의 오피스 룸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김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만 해도, 리키는 병원에 옮겨진 상태였다. 김 선배의 말에 따르면 책상 의자에 앉아 목에 끈을 맨 리키의 얼굴은 숯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말이야. 김선배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녀는 그가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을까 두려웠다. 너는 오늘 새벽에 리키 방엔 왜 들어갔던 거야? 그 방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고 선배가 물어올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다행히도 선배는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거실 가운데 우두커니 섰다. 몸속 핏줄이 두 개로 갈라졌고, 두 갈래의 피가 방향을 달리하며 돌기 시작했다. 휴가 시작부터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실 그녀는 M에게 이 일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우선 이 일을 어떤 식으로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M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올해 초부터 이번 휴가만을 기다리며 긴 시간을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M은 작년 승진 심사에서 누락된 후,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말수가 줄었고, 밤늦게 멍하니 티브이를 보며 술을 마시는 날이 부쩍 늘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M에게 이번 휴가를 제안했다. 20대 때 서핑에 빠져 틈만 나면 파도를 찾아 떠돌아 다녔다는 M을 위해 여행지는 발리로 결정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M은 그녀가 발리행 티켓을 끊은 후부터 얼굴에 묘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부모님 댁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서핑 보드를 가지고 와서 깨진 노즈 부분을 수리해 거실 한구석에 세워 두었다. 짙은 나무색의 보드로 데크엔 ‘FEATHER 321’이라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3 조회수 767상세보기 -
소설 김태선 - 관람객
관람객 김태선 전시회장 입구가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슈트와 흰 셔츠 일색이다. 단체를 방불케 하는, 예상을 압도한 수의 사람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고여 있던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들이 밝은 빛을 내는 엘이디 광고판들을 지나 여러 갈래의 통로로 흩어져 회사 부스 앞으로 오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숨을 고르며 테이블 위 제품을 한 번 더 정밀하게 정렬하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민서는 전시회가 성공적이기를 바랐다. 지원을 받아 겨우 참가하게 된 전시회가 생존의 밧줄이 되기를,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기대로 바뀌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다시 구직자의 처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회사의 존망에 그토록 마음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치고 싶지 않은 자존심과 자신의 제한된 능력에서 오는 절박함은 회사의 안위를 바라는 열망에 가 닿았다. 한 노인이 옆 사람들 틈을 비집으며 테이블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크로스로 메고 있는 가방을 열더니 명함을 꺼냈다. ‘하루토’라고 자기 이름을 한 글자씩 분명히 말했다. 차림새와 나이대로 미루어 직장인으로도 아이티 업계의 CEO로도 보이지 않았다. 관람객은 주요 영업 대상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구라도 관심을 보이는 것은 나쁘지 않다. 홈쇼핑 방송에서 호응 좋은 방청객처럼. 하루토 상은 테이블 위에 있는 제품과 센서 모듈을 보며 물었다. “저속 알에프 통신으로 보내는 신호가 멀리까지도 가나요? 그러니까 라디오 주파수처럼.” “네. 맞습니다. 광활한 공간까지 리피터가 가능해요.” 그는 부스 안 패널에 쓰인 내용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걸릴 거 없이 산도 넘고 물도 건널 수 있겠군요.” 높은 산 위를 지나고 출렁이는 파도를 건너는 새의 날개가 눈앞에 그려졌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민서가 대답했다. “네. 저희 특허 기술이에요.” 그가 호기심만으로 질문하는 것인지, 판매와 관련된 어떠한 제안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술적인 부분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민서가 대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막 설명을 마친 사장을 보며 그에게 권했다. “하루토 상, 안에서 저희 대표님과 더 이야기해 보시겠어요?” “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민서가 목에 걸고 있는 이름표를 보고 허리 숙여 인사한 후, 곧바로 부스 옆 거치대에 있는 브로슈어를 하나 집어 들며 웃어 보였다. 그가 서 있던 자리는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명함을 잠깐 솟아오르던 기대와 함께 명함 케이스에 넣었다. 회계 관리를 맡고 있는 민서가 도쿄에 오게 된 것은 최근 일 년 동안 회사 형편이 더 나빠졌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26상세보기 -
소설 최정화 - 영거, 젊어진 사람들
영거, 젊어진 사람들 최정화 한나 거리는 온통 젊은 사람 천지다. 정확하게 말하면 ‘젊은’ 사람이 아니라 ‘젊어진’ 사람들이다. 내가 반백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갈 때면 사람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노인이야. 요즘 세상에 스타핑 안 한 사람 있다는 얘긴 들었지만 진짜로 얼굴 본 건 처음이야.” “아, 징그러워. 물에 불은 시체 떠올라서 구역질 날 것 같아. 껌처럼 들러붙은 검은 점은 또 뭐야. 제대로 걷는 것도 어려워 보이는데 왜 나와서 돌아다니는 거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야 하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정작 견디기 어려운 건 친구들이 모두 시술을 받고 20대로 돌아가는 바람에 혼자가 된 외로움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주름진 피부, 검버섯이 올라온 얼굴, 굽은 허리 같은 것들이 뭔지 몰랐다. 다양한 방법은 다들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노인이 되는 게 두렵거나 싫은 게 아니었다. 다만 함께 나이 들어갈 친구가 필요했다. 육신이 쇠퇴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에게 세상을 넘겨주고, 또 언젠가 닥쳐올 죽음을 함께 준비할 동료가. 하지만 내 친구들 누구도 더 이상 늙지 않았다. 그들은 시술을 받아 젊음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나는 혼자서 폐경을 맞고, 머리가 백발이 되는 것, 얼굴이 내려앉고 다리가 벌어지는 일에 침착하게 대처해야 했다. 나는 몸이 늙어 간다는 것이 자연이 준 유예 기간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계시 같은 것 말이다. 떠난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그것이 신의 시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어진 이후에도 내 아이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금씩 내 자리를 비워 가는 것은 성숙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저 계속 살고 싶어 했고, 그것도 젊은 몸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호르몬 체인지 시술을 받고 나이를 바꾼 다음에 이름을 바꿨다. 그다음에는 이사를 갔고, 가족과 친구들과 일체의 연락을 끊었다. 그들은 그렇게 새 삶을 시작했다. 나는 꿈에도 젊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모든 이들이 노인을 혐오하는 시대에 혼자서 그 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또 친구 하나 없이 단독자로 세상을 살아갈 용기 또한 없었다. 주변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대화 나눌 친구 하나 없는 고독감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채 2045년 1월, 나는 백기를 들었다. 나는 지금 입원실 침대에 누워 한 달 뒤로 잡혀 있는 호르몬 체인징을 기다리는 중이다. ‘호르몬 리버스’는 스타핑 시술 전문병원이다.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모두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노인이다. 나이는 서른 살에서 백 살까지 다양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모정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어떤 이유에서든 노년기의 성찰을 포기하고 활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67상세보기 -
소설 양혜영 - 자살심판관
자살심판관 양혜영 [예비심판관 김안의 면접 녹취록] 질문자: 오르디나토르 외 6인 장소: 스위스그랜드 호텔 613호 오르디나토르: 먼저, 예비심판관 면접에 오른 걸 축하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예비심판관님의 경력을 조사한 결과 최종 후보에 올랐고, 이제 여기 모인 여섯 심사관이 심층 면접을 통해 최종 선택을 결정하려 합니다. 예비심판관님은 심사관의 질문에 진실만을 답해야 합니다. 답변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거짓말탐지기가 부착되며, 예비심판관님의 답변은 모두 녹취되어 향후 법적 분쟁이 발생할 경우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김안: 네, 알겠습니다. 오르디나토르: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여섯 심사관의 이름과 신상은 블라인드 처리되어 현재 착석한 자리에서 시곗바늘 방향으로 모노, 디, 트리, 테트라, 헥사, 펜타로 지칭될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에 대한 질문이나 이의가 있습니까? 김안: 아니오, 없습니다. 오르디나토르: 그럼, 현재 2046년 6월 6일 오후 2시 13분. 자살허용심판관 선정을위한 최종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노님, 질문을 시작해 주세요. 모노: 대한민국 최초의 자살허용예비심판관 후보 1번, 김안. 1986년 경기도 파주 출생. 2010년에 사법고시 수석 합격 이후 2040년 재판관 역임. 2043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청렴한 재판관으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 수상. 그런데 돌연 2044년에 판사를 그만두고 자살고위험군을 보호하는 생명존중연구소에 소장으로 취임해 현재까지 2년 가까이 생명존중연구소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본인의 공적 경력이 맞나요? 김안: 네 맞습니다. 디: 본격적인 면접 질의에 앞서, 자살허용심판관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세요. 김안: 2033년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경제공황 이후 자살하는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홀로 혹은 집단으로 뭉쳐 다니다 숲과 강, 빈집에서 예고 없이 자살을 시도했고,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방치된 시신들 때문에 시민들은 공포와 전염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는 2046년 1월 세계에서 최초로 자살허용법을 제정했고, 자살 허용 여부를 판단할 자살허용심판관을 뽑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생명은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아름다울 때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을 부여하는 자리가 자살허용심판관이라 생각합니다. 트리: 예비심판관님께서 자살허용심판관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요? 김안: 저는 법조계에서 36년간 근무하면서 선과 악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반평생을 오롯이 선과 악을 판별하는 데 전력을 다해 왔던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판단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재 소장으로 근무하는 생명존중연구소만 봐도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가득 차 더 이상 자살고위험군을 수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전국 각지에 있는 다른 지역의 생명존중연구소의 상황도 같습니다. 이렇듯 자살고위험군을 보호하지 못하면 앞으로 자살자가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48상세보기 -
소설 김아나 - 콩코르드
콩코르드 김아나 2022년 12월 19일에 열린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 연장전 118분에 킬리언 음바페가 페널티 킥에 성공했다.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스코어가 공식적으로 동점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바람막이 안주머니에 있는 유리병을 떠올렸다. 나는 반포동 지하 작업실 일 인용 소파에 앉아 손잡이를 꽉 잡았다. 작업실에 모인 민수 형과 친구들은 질서정연하게 대마초 가루와 펜타닐 패치가 담긴 지퍼 백을 정리했다. 민수형의 친구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너 슛돌이 출신이지? 초등학생 때 프랑스로 축구 유학 갔다고 하지 않았냐? 음바페 봤어? -내가 거기서 걜 어떻게 봐? 민수가 감자 칩을 씹으며 불편한 내 왼쪽 다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악의 없이 말했다. -우리 슛돌이 우진이는 프랑스에서 유학원에 사기도 당했고 다리까지 다쳤대. 나는 음바페 때문에 돈을 잃을까 봐 초조했다. 음바페는 메시와 호날두가 늙어 가는 시대에 운 좋게 태어난 놈이었다. 너는 파리 생제르맹 FC의 유명 인사지만 나는 인터넷 악플러 레전드야. 인스타그램에서 보자. 지하 작업실에는 나와 민수 형까지 총 여섯 명이 모여 월드컵 우승 팀 맞추기 도박 겸 비즈니스 중이었다. 아르헨티나 승리에 돈을 건 건 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연장전이 끝났다. 각국 선수들이 승부차기 대기 중이었다. 경기가 끝난 것도 아닌데 민수 형이 친구들에게, 친구라기보다는 따까리에 가까운 아이들에게 지퍼 백에 관해 이것저것 지시했다. 아마 민수 형의 친구들은 아닌 것 같았다. 2학년 형 중에 저런 애들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 같은 고1일 수도 있었다. 민수 형이 나와 친구들에게 바람 좀 쐬자며 작업실 바깥으로 나가자고 했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형의 거대한 등을 뚫어지게 보았다. 형이 입은 디올 후드 티가 멋졌다. 삼두근과 광배근도, 190cm에 가까운 큰 키도 존나 멋졌다. 형은 슬리브를 따라 내려오는 오블리크 패턴 후드 티를 입었다. 음바페도 디올 앰베서더라 민수와 같은 후드를 입었다. 아르헨티나가 이긴다면 나 역시 민수형 과 음바페가 입은 후드 티를 살 수 있을 텐데. 민수 형과 친구들은 나보다 먼저 작업실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불편한 왼쪽 다리 탓에 다소 느린 걸음으로 형과 친구들을 따라갔다. 민수 형을 제외한 따까리들은 이자카야 가게 정문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민수 형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전담도, 술도 하지 않았다. 막 학원 수업을 끝마친 애들 몇이 이자카야를 지나쳤다. 나는 걔네가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형은 왜 마약 안 해? 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집중하지 않았다. 민수가 어깨를 으쓱인 뒤 대답했다. -원래 마약왕은 약 안 해. 슛돌이는 넷플에서 나르코스 봤어?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비즈니스맨이니까. 사업가는 약을 안 해. 민수 형은 아직 승부차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에게 지퍼 백을 배달하러 가라고 지시했다. 나는 걔네가 사라져서 아쉬워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래도 같이 축구를 봐서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79상세보기 -
소설 오선호 - 나희
나희 오선호 “하늘 아래 혼자인 것을 충분히 느껴보세요. 겁먹을 필요 없어요. 일어나 앉기만 해도 옆 사람 있는 곳이 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알려드린 것들 유의하시고, 각자 자리로 갑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오늘 모인 여섯 명이 제자리에 잘 누운 것을 확인한 후에도 나희는 한참 동안 모두의 침낭이 다 보이는 둔덕 위에 가만히 서 있다.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잦아들면서 밤의 소음이 살아난다. 산 입구에서 등산로를 따라 3킬로미터쯤 올라가다가 약수터 뒤로 길 없는 숲을 15분 정도 헤치고 지나가면 인적이 드문 평지가 나온다. 지난겨울 비박 팀 운영을 쉬는 동안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이후, 나희는 올봄부터 모임 장소를 여기로 정하는 일이 많았다. 지하철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에 뚝 떨어진 야산 같은 장소가 있는 것이 신기하여 처음 와 본 참가자들은 대개 눈이 휘둥그레진다. 성긴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보이는 밤하늘에 별은 몇 없지만, 발아래로 멀리 도시의 불빛이 은하수다. 실외의 밤은 소란하다. 오만소리들이 규칙 없이 섞이고 겹치다가 흩어진다. 풀, 나무, 바람, 새, 벌레, 길짐승, 자동차, 라디오, 죽은 사람, 산 사람. 무엇이 내는 소리인지 알기 어려워 더욱 귀가 기울여진다. 나희는 바깥의 밤이 막연했던 추측과 달리 전혀 적막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자신이 언젠가는 밖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예감한 적이 있었다. 캄캄하면서도 알 수 없는 소음 가득한 것이 자신의 마음속과 똑 닮아있어 무척이나 친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결국 그 예감은 맞고 말았다. 지붕도 벽도 없이 살아온 세월이, 꼽아보니 10년이 훨씬 넘는다. 밤의 소리를 들으며 낡은 침낭 안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나희는 5년 전부터 세 명에서 여덟 명 사이의 팀을 꾸려 텐트 없는 야영을 인솔하고 있다. 비박이라고 하는데 노숙이라고 해도 뭐가 다른가 싶다. 참가비가 저렴한 대신 비비커버나 침낭, 매트 등을 대여해주고 비용을 따로 받는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목, 금, 토, 일주일에 세 번, 비가 오지 않으면 늘 나희는 이 일을 한다. 맨 처음은 나희가 책을 낸 직후 출판사에서 기획한 행사였다. 책을 내게 될 줄은 몰랐다.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 일자리와 살 자리를 쫓다 보니 여러 곳을 떠돌게 되었는데, 그것이 남들의 눈에는 여행처럼 보였나 보다. 상당히 길고 특이한 여행. 귀국한 해 겨울에 숙식이 되는 찜질방에서 일하면서 나희는 비번 때마다 매점 옆 피씨방에 처박혀 자신의 경험을 블로그에 글로 썼다. 나가서 쓸 돈도, 따로 만날 사람도 없었다. 하루 평균 서른 명 안팎의 블로그 방문자 중에 의욕적이지만 경험은 부족한 편집자가 있었고, 몇 가지 상황이 맞아 돌아가 나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책을 냈다. 편집자의 손을 거쳐 자세한 돈 얘기가 쏙 빠지니 나희의 이야기는 꽤 그럴싸한 여행기처럼 되었다. 1쇄가 거의 다 팔렸지만 2쇄를 찍지는 않았다
작성일 2024-10-22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452상세보기 -
소설 김동하 - 사이즈
사이즈 김동하 추석이었으므로 여동생과 나는 서해안과 접한 고향집에 들렸다. 왜 들렸냐고 묻는다면 차례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례를 지내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아빠는 거실에서 굴러다니는, 둘의 나이를 합하면 자신과 동년인 아들, 딸에게 심심하면 바다 구경이나 하고 오라 했다. 그나마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싸가지는 없어도 개념은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으므로 거들 일은 없냐고 물었다. 엄마와 아빠는 동시에 없다, 했다. 가을 농가에 일이 없겠냐마는, 흙보다 아스팔트가 익숙한 자식들 손에 흙을 묻힐 정도로 급한 일은 없다는 뜻. 동생과 나는 잠시 갈등했다. “물꼬 좀 보고 올란다.” 아빠는 구체적인 행선지를 알려 주지 않고 먼저 집을 나섬으로써 우리의 결정을 손쉽게 해 주었다. 동생과 나는 어릴 적 추억을 재현한답시고 호기롭게 꽃게잡이 채비를 꾸렸다. 장화며, 밀짚모자며 유난스러운 준비 과정을 지켜보던 엄마의 얼굴에 수심이 찼다. “뻘에는 들어가지 말고 그냥 바닷바람이나 쐬고 와.” 엄마는 안개 낀 개펄에서 낙지를 잡다 죽었다는 이웃 마을의 누군가를 예로 들며 걱정을 내비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때 엄마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우리는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개펄에 들어가 돌을 들추기 시작했다. 박하지를 잡다 보니 꽤 깊이 들어와 있었다. 슬슬 물때가 바뀔 때니 뻘에서 나가야 했다. 그때 멀리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우리 부르는 거 아냐?” 굴 양식장은 엄연한 어촌계 사유지로 그곳에서 외지인이 뭔가를 잡는 건 불법이었다. 그러나 보통은 어영부영 넘어가 주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까칠한 양반에게 걸렸나 싶었다. 멀리, 개펄 밖에서 손짓하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그 사람을 주시했다. 예상과는 달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연신 우리를 부르고 있는 이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삼촌이라 부르던 한마을에 사는 노총각이었다. 저 삼촌이 왜? 놀기 좋아하는 삼촌이 개펄에 들어오지도 않고 해안가에서 부른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나와 동생은 서둘러 백사장을 향해 걸었다. 그래봐야 무릎까지 빠지는 펄 위라 한없이 느린 걸음이지만. 급하게 개펄을 벗어나려다 장화 한쪽을 잃었다. 그러나 펄에 박힌 장화를 빼낼 틈은 없었다. 그때쯤 동네 삼촌이 하는 말이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안에 이른 우리가 삼촌의 트럭을 타고 곧장 향한 곳은 인근 대도시의 병원이었다. 엄마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갈비뼈 여섯 개가 부러졌거나 금이 갔고 부러진 뼈 일부가 폐를 찔렀다고 했다. 엄마의 옆구리에는 내출혈로 인해 고인 혈액을 빼내기 위해 호스가 연결돼 있었다. 투명한 호스를 타고 검붉은 피가 흘렀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일이 없다던 아빠의 말은 거짓이었다. 우리가 외출하자 엄마와 함께 농약을 치러 나섰고 그 과정에서 엄마는 사고를 당했다. 우리 집에는 혼자서 농약을 칠 장비가
작성일 2024-10-22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41상세보기 -
소설 김근하 - 너를 위한 냉장고는 없다
너를 위한 냉장고는 없다 김근하 밤낚시 갔던 남편 민욱이 돌아왔다.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굳게 닫힌 암막 커튼을 열었다. 암실 같던 거실이 환해졌다. 밖이 새하얗다. 집안에 불안과 침묵이 소복소복 쌓이는 동안 창문 너머 바깥세상에서는 명랑하게 눈이 내렸다. 민욱은 낚시통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붕어를 꺼냈다. 손이 미끄러운지 바닥에 떨어뜨렸다. 사방에 비늘 같은 물방울이 튀었다. 식탁 밑으로 떨어진 물고기는 죽은 듯 조용했다. 서랍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꺼낸 민욱은 복면을 씌우듯 대가리부터 재빠르게 감쌌다. 다급해진 붕어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는 꿈틀거리는 붕어를 그대로 냉동실에 넣어버렸다. “제발 좀!” 새벽부터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민욱은 언제부턴가 먹지도 않는 물고기를 잡아 와 손질도 하지 않은 채 얼려버렸다. 가져다 놓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라도 손질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살아서 꿈틀거리는 건 질색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나의 타박을 가볍게 무시했다. “내 손에 남은 건 뭐 있지? 남은 게 있기나 할까.” 낚시통을 베란다에 가져다 놓고 욕실로 향하던 민욱이 갑자기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낚시터에서 잡아 온 물고기를 냉동실에 생매장한 사람이 상실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이없었다. 냉장고를 가득 채운 것은 물고기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도 되는 걸까. 그중엔 유해 어종인 블루길도 몇 마리 들었다. 민욱은 낚싯대에 걸린 것들을 모조리 집으로 가져왔다. 아마 물뱀이 잡혔더라도 가져왔을 것이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민욱은 말없이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다니던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일 년 가까이 휴대전화를 꺼놓고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나와 같이 한 침대를 쓰는 것도 불편했는지 옷가지와 노트북을 챙겨 안방에서 작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방은 네 개의 방 중에서 가장 작은 방이었다. 현관 입구에 붙어있는 방에는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욱은 그 방에서 잡동사니처럼 구겨져 밤을 지새웠다. 어느 날 그가 퀭한 눈으로 말했다. “낚시터만큼 잠이 잘 오는 곳이 없대.” 민욱은 낚시터가 불면증에 더없이 좋은 장소라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불면증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낚시터에 가서 좋아졌다는 글이 많이 올라오더라고 했다. 민욱은 속는 셈 치고 한번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는 말릴 틈도 없이 장비를 사들였다. 한 번 갔다 오기엔 터무니없이 많은 장비였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해도 끄떡없을 방한 점퍼도 한 벌 마련하고 낚시터로 떠났다. 중무장하고 떠난 사람이 몇 시간도 안 돼 돌아왔다. 얼어 죽을 같아.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못돼. 그렇게 말했던 민욱은 다음날이 되자 다시 꾸역꾸역 장비를 챙겨나갔다. 차츰 낚시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는 방한복을 뚫고 들어온 찬바람에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잠이 쏟아지더라고. 눈
작성일 2024-10-22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89상세보기 -
소설 김솔 - 최대 소수를 위한 최대 불행
최대 소수를 위한 최대 불행 김솔 1. 화요일 야근을 마치고 아파트 입구의 편의점에 들러 맥주 4캔과 감자 스낵을 들고 11시쯤 귀가했을 때 아내가 내 손에 든 비닐 봉투를 낚아채며 아직도 아파트 현관문 앞에 항의문이 붙어 있어? 뭐가 붙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복수를 천명하는 선전 포고문 같은 종이 말이야.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는데, 무슨 일 있었어? 말도 마. 경찰차까지 등장하고 난리가 아니었다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었냐고? 누군가 장애인 전용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웠다가 과태료 딱지를 받았나 봐. 잠깐만. 경찰이 아파트 단지 안까지 들어와서 주차 단속을 했단 말이야? 그게 아니고, 아파트 주민 누군가가 불법 주차 사실을 구청에 신고한 거지. 담당 공무원이야 명백한 증거 앞에서 민원을 규정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랬더니 자동차 주인이 신고자에게 복수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골프채로 자신의 자동차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어. 경찰차까지 출동한 뒤에야 소란이 겨우 멈췄는데, 경찰 조사를 받고 귀가한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자필로 항의문까지 현관에 붙였더라고. 설마 공익 신고자의 정체가 들통 난 건 아니겠지? 항의서가 이 건물에만 붙어 있는 걸로 봐서 위반자나 신고자 모두 이곳에 사는 것 같아. 하긴 방문객들이라면 그렇게 외진 곳에 주차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지.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도 이웃에게 야박한 건 마찬가지군. 장애인 주차장에 자동차를 잠시 세우는 게 미풍양속을 파괴할 만큼 파렴치한 일인가? 당신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난 당신이 공익 신고자라고 의심하는 게 아냐. 우리가 아무리 은행 대출 이자에 쪼들린다고 하더라도 이웃들을 불행하게 만든 포상금으로 반찬 값을 해결하는 건 나도 엄연히 반대야. 갑자기 맥주 맛이 싹 사라졌어. 이야기는 그만하고 자자. 뭐야, 잔뜩 궁금하게 해 놓고 이렇게 마무리하면 안 되지. 그래서 범인은 잡힌 거야? 아니. 하지만 강력한 용의자를 알고 있긴 하지. 최근에 12층으로 이사 온 여자가 매일 아침 장애인 전용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휠체어 탄 노인을 태워 나간다는데,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곳을 이용하는 주민이 거의 없었다고 청소 아줌마가 귀띔해 줬지. 우리까지 알게 됐다면 이미 피해자의 귀에도 들어갔을 테니, 또 한 차례 활극이 벌어졌겠군. 안 그래도 밤늦게까지 12층 거실 전등이 켜지지 않는다고 아줌마들끼리 쑥덕거리고 있었지. 장애인 주차장도 텅 비어 있고. 아냐, 지금 저기 자동차가 두 대나 세워져 있는 게 보이는데. 그럼 적어도 한 명의 차주는 내일 또다시 과태료 딱지를 발부받은 데 항의하는 차원에서 골프채로 자신의 차를 박살내게 될지도 모르겠네. 아직도 현관문에 항의문이 붙어 있는지 확인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쓰레기 버리면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테니 먼저 자. 도대체 그 놈의 담배는 언제쯤 끊을 건데? 은행 대출금 갚을 때까지만 기다
작성일 2024-10-22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40상세보기 -
소설 1분에 14타 - 숫자의 위력
숫자의 위력 1분에14타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자명(子明), 호는 오리(梧里). 대흥(大興) 출신 박율(朴繘)은 아버지 박이건(朴以健)과 어머니 여계선(呂繼先)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총명하고 성리학에 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다소 엉뚱한 면모가 있었다. 그의 엉뚱함은 언문으로 쓰인 낙서 때문에 시작되었다. 개 똥 아 똥 누 니 아 니 오 저잣거리에서 아이들이 장난으로 써 놓은 낙서를 접한 박율은 세로로 읽어도 말이 되고 가로로 읽어도 말이 되는 문장에 흥미를 느꼈다. 남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갔을 낙서 때문에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율은 글공부를 하다가도 세로와 가로로 말이 되는 문장을 찾기 시작했고, 급기야 앞으로 읽어도 말이 되고 뒤로 읽어도 말이 되는 양방향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장을 찾으면서 '대칭'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집착은 그를 더욱 강박적으로 만들어 가로, 세로, 대각선, 양방향 모두 대칭이 되는 문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첫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던 박율은 뼈대도 보통 뼈대가 아닌 용가리 통뼈 양반 집안 출신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문과 시험이 아닌 수학과 계산을 맡은 산원(算員)이 되고 싶어 하급 기술관 시험을 치려고 역과·의과·음양과·율과로 이루어진 잡과에 몰래 응시하려다가 부친과 동문수학을 했던 참시관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을 맞았다. 치도곤을 맞았다고 해서 진짜로 곤장을 맞은 건 아니고 양 싸대기를 왕복으로 후려 맞아 쌍코피가 났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박율은 재응시한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이 될 수 있었다. 사실 박율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과거 시험의 책문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언뜻 쉬운 문제 같아 보이지만 성리학 공부에만 매달린 유생들에게는 손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제시문이었다. 정철의 속미인곡이 임금에 대한 충정을 노래했다는 식의 해석에만 매달려 공부하던 일반적인 유생들과 달리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쓴 정철이 글에서 엿보이는 진심과 내용으로 미루어 동성애자가 분명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쳐서 훈장 선생님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날리도록 두들겨 맞았던 박율에게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손쉬운 문제였다. 대칭이라면 자신 있었던 박율은 일필휘지로 휘갈겨 쓴 후 양손을 탁탁 털어 대며 제일 먼저 답안지를 내고 과거 시험장을 나설 수 있었다. 음주와 가무를 즐기며 창민요(唱民謠)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박율은 "산천초목 속잎이 난듸 구경가기 얼화 반갑도다."라는 첫 구절에 영감을 받아 대칭 형태의 한시로 표현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에 식은 죽을 후식으로 들이키는 것보다 쉬웠다. 과거 시험 책문에 대한 박율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山川草木(산천초목) 川山木草(천산목초) 日月明星(일월명성) 月日星明(월일성명) 雨雲風雷(우운풍뇌) 雲雨雷風(운우
작성일 2024-10-22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46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