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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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UB월장원 선정
그는 빠르게 지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잠에 드는 사람도 아니었다. 체질이라는 선천적인 비극이 그의 한평생을 덮치고 있었기 때문에, 밤중의 열차 안에서도 그는 피로의 고통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구매한 표는 지나치게 저렴했고, 악바리 운행의 진수를 교시하는 열차는 지나치게 낡아 있었다. 직물 시트는 먼지가 잔뜩 묵은 데다 고릿한 얼룩이 선객을 자처하고 있었다. 좌석의 불결한 관리 수준은 몸을 눕히고픈 충동으로부터 실행력을 앗아갔다. 애초에 그가 택한 일반 객실은 누울 만큼의 공간을 확보하기도 마땅치 않은 크기였다. 오늘 종일 치러야 했던 곤욕을 회상하노라면 그는 이가 갈렸다. 경찰에 연행되는 바람에 타려던 특급 급행열차는 결제까지 마치고도 떠나보내야 했다. 우매한 공권력은 해가 저물도록 그를 잡아 둔 끝에야 멋대로 씌운 혐의를 벗겨 내고 응당한 자유를 되돌려 주었다. 그를 풀어주던 경찰은 그저 한마디를 웅얼거렸다. ‘오해였습니다.’ 그건 분명 사과가 아니었다. 망할 작자는 오히려 아깝다는 기색이었다. 어떻게 되먹은 일처리 정신인지. 그래, 위로금을 지급한다든가 하는 일말의 성의도 당연하다는 양 생략됐다. 온갖 절차를 늘어뜨리고 진행됐던 굼뜬 취조와는 참으로 대비되는 신속한 종결이었다. 한적해진 역에서 그는 부랴부랴 새 열차 편을 알아보아야 했고, 황혼녘의 철도역은 구시대적 승차감을 자랑하는 퇴물 단 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후회 또는 분노하기는커녕 앞서 벌어진 일을 되감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뻣뻣이 절전된 그는 좌석 등받이에 얌전히 상체를 기대어 뿌연 창문 너머의 역동적인 어둠을 멍하니 주목할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 황폐한 농원을 가로지르던 열차는 언제부터인가 아무런 형체도 분간할 수 없는 풍경을 선사하고 있었다. 경유하는 고장의 영화관에 걸린 개봉작을 확인한다거나 벌판에 듬성듬성 등장하는 나무를 셈하는 유희도 막혀 버렸다. 아쉽게 된 대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단조로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비교적 낮은 온도의 공기가 그의 적막에 유입되었다. 경미한 변화를 감지한 그는 기민하게 시야를 재확보했다. 문이 스륵 열렸고, 누군가 문틈으로 구두코를 디밀었다. 웬 여자가 객실에 성큼 들어와 곧장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갑작스레 출현한 목전의 여자를 찬찬히 훑었다. 생기가 부족한 인상임에도 뚜렷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검은 모발은 부드럽게 굽은 직모였고, 윤기와 탄력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었다. 흐뭇하게 뻗은 눈매에 담긴 검푸른 눈동자는 짙은 그림자가 진 바다를 연상케 했다. 흰 피부는 비록 심히 창백한 감이 있었으나 장인의 수제 사탕처럼 매끈한 동시에 신선한 윤기가 흘렀다. 야릇한 기품을 갖춘 기묘한 여자였다. 물론 상대를 단숨에 홀리는 매력을 풍긴다 해도 구태여 비좁은 객실에 합석하려는 만행은 참작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긴 흑발의 미녀이기 전에 고상한 태도의 불청객이었다. 게다가 꺼림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여자의 명품 코르사주 같은 외관에서 휘몰아치는 독한 소용돌이가 적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지존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9상세보기 -
소설 K월장원 선정
우리가 ‘작업’을 할 때. 피부는 투명하게 마르고 있었고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면 찌릿거리며 정전기가 옮을 것 같았다. K는 인어. 상체는 로봇이고 하체는 진짜 물고기 꼬리였다. K는 반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집은 K에게 불법적으로 수조를 제공했으며 필요할 때 배터리를 갈아끼워주웠다. 대신에 때마다 K의 살점을 조금씩 떼어내서 횟감에 섞어 팔았다. 그것을 우리 가족은 ‘작업’이라 불렀다. 비린내. K 앞에선 어떤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투명해서 기분 나쁜 수산시장 소독약 물 냄새만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어떻게 K같은 존재가 우리집에 있는지, 애초에 K같은 존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K를 아는 사람들 중, 그러니까 엄마나 아빠, 이모나 이모의 외동아들 중...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알고 있어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 비밀을 알고 싶지 않았다. K는 감정이 없는 눈동자로 이층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K의 그런 취미 때문은 아니지만 창문에는 썬텐지가 짙게 발려 있었다. 걸어다니고 싶은 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K가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횟감을 뜨는 것처럼 K를 물에서 건져내 수건을 깐 바닥에 눕혔다. 엄마가 공구 상자를 가져왔고 녹이 슨 곳을 대충 살펴본 뒤 인공 피부를 가르고 철로 된 흉곽을 열었다. 아빠의 손놀림은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물기를 닦아냈고, 구석구석 방수 스프레이를 뿌렸다. 우리 가게는 호황이었다. 각종 인터넷 매체도 여러번 타 돈을 많이 벌었다. 나는 K의 꼬리지느러미에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던 종류의 마약 성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빠가 일련의 행위를 거의 마무리하는 동안 나는 관심 없는 척 철과 살이 맞닿아 있는 이음새를 여러 번 살펴보았다. 심장에서 피가 흐르지 않는데 어떻게 꼬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지, 도대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있지 너무나도 궁금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때 허공을 바라보던 K와 눈이 마주쳤다. K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것은 분명히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뻗뻗하게 굳어버렸다. K의 지능은 당연히 평균적인 로봇의 학습 프로그레밍과 비슷할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너무 구형이라 요즘 시장에 나오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인간형 로봇의 지능은 원래 수준이 높았다. 기업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굳이 돈을 들여 인간 형태를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능이 높은 로봇은 좋다. 지능이 낮은 로봇도 그 형태에 따라 쓸모가 있다. 하지만 지능이 낮은 인간형 로봇을 누가 원하겠는가. 아니, 그런데 기업에서 양산형으로 만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아무튼 중요한 건 K가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말이었다. K가 또다시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움직이려고 움찔거리는 입으로 시선을 집중할 때 풍덩 소리와 함께 K가 수조로 던져졌다.ㅡ가족 외의 누군가 K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지난 여름이었다. 폭염주의보로 인해 아무도 거리로 나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방백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3상세보기 -
시 일방통행월장원 선정
산 골목에서 물을 따라가는 물고기는 만났지만산 골목에서 몸을 따라가는 물고기는 보지 못했다산 아래 산을 먹은 학교에 다니는 너도산 아래 산을 먹은 학교를 뱉은 나도산 골목을 몸이 걸어 다니지 못했다학교 주변 건물은 시속이 낮다어린이 보호 구역 어린이 틈에서 몸이 자란 나는어린이라 불릴 수 없지만 몸이 산에 눌어붙어서물고기의 흐름으로속도 낮은 골목을 걸어야 했다골목에 있는 물고기뻗어나가는 나무학교 주변 낮은 어린이들작은 속도를 가진 건물 사이나도 그렇게 작은 얼굴을뻗어가며 학교 품에 들어갔었지산을 먹은 학교에는 물고기 그림이 많았다나도 흘러가는 물고기 중 졸업사진에 그림이 걸린 그런 사람이고뻗어나가는 나무 주변에서 깊어지는 몸 낮은 건물 중 하나고나는 어린이 안에서 자라고 작아졌다학교에는 자리가 있었고몸은 그 자리에 앉았다내 옆 짝꿍인 너도 산에서 내려와서몸을 낮게 하는 연습하고 있다지낮은 건물이 많은 골목에서몸이 흐릿하고 페인트가 좁아지는 너와 나는옆에서 똑같이 흘러가어린이를 보호하자는 학교 주변 골목을산속에 묻어 놓았다뻗어나가는 골목의 나무는 산속에서 왔고우리가 다니고 다녔던 학교는 산을 먹었고학교 운동장에서 물고기의 작은 물방울을 들으며학교 속 그림들과 골목을 묻는 방법을 이야기했었다낡은 물방울작은 눈방울작년 웃음운동장 모래에 떨어졌다선생님은 그림과 떠드는 나와 너를몸을 자라게 뻗게 했다자라는 것은 몸이 커지는 일인가?너는 뻗은 나무에 걸린 많은 물고기 그림을 보고나는 굳은 나무에 열린 낮은 건물 속 물방울을 보고졸업사진 속 물고기들은 물방울만 남았다몸을 잃은 물 속을 걸어다니는 물만 남았다짝이었던 나와 너는 돌아가는 것을 팠고골목을 묻는 법을 낮은 속도로 머리에 놓았다학교 종이 울린다어린이들이 골목에서 과속하며 뛰어나온다물고기의 거품이 하나씩 터져갔고작은 건물에는 물고기 웃음이 낡아거리에 그림은 뻗은 가지치기가 됬다나는 거리를 돌아서 가지가 빠진 나무를 봤고운동장의 모래를 모래 속 흙에 찼다너는 물고기의 몸을 버렸다나는 산으로 돌아갔고페인트가 빠지며 오염되었다건물에서 흘러가는 나에게 딱지가 날라왔다돌아가는 것도 흘러가는 것도
작성일 2025-03-31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6상세보기 -
시 시인의 말월장원 선정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제가 더 이상 인용할 슬픔이 없어서요 여긴 초행길이에요 당신이 본 풍경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저는 사람의 표정을 채집하는 사람인데 이 마을의 분위기는 제법 심상치 않군요 비애와 사랑이라는 두 단어를 동시에 잃어버린 세계는 역시 밋밋하군요 당신의 손에 시적인 순간들을 쥐어줄 순 없을 것 같아요 며칠 전에 시인들이 추방된 동네는 이곳밖에 없다고 들었어요 이곳의 지식인은 비애를 갖고 가난뱅이는 사랑을 하는데도 모두가 저마다의 삶을 포기하다니 이상한 일이네요 그들에게 오래된 시집과 빵 조각을 남겨두세요 아이들의 무릎에 잠긴다는 표현을 새기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불온한 이들의 시는 모두 어딘가에 기록되고 있겠죠? 이만 줄일게요 저희 마을에는 안타까움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남아있길래 우연히그는 우리 마을의 슬픔을 제법 인용한 듯 했다그가 남긴 글귀는 시인의 말로 비석이 세워졌고동네 사람들이 침을 찍, 뱉고 바구니에 물을 길러온다
작성일 2025-03-31 작성자 옥상정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7상세보기 -
수필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시인이다월장원 선정
1. 선물은 증표이다. 지난 1월 20일 글틴 캠프 참여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날, 대전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나는 보았다, 성심당 앞에 죽 늘어선 대기 줄을. 역 안을 오가면서도 사람들 양손에 쥐어진 성심당 종이가방이 보였다. 대전인으로서 의문이었다. 성심당 빵이 값싸고 맛있긴 하다. 그래도 저렇게 한 시간 동안 줄 서서 먹을 정도는 아닌데. 그리고 이 의문은 뜻밖이게도 지지향에서의 경험으로 풀렸다. 지지향은 글틴 캠프가 열리는 장소다. 글틴이란 것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으로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문학 작품을 올리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글틴을 운영하는 한국문화예술 위원회는 매년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학 캠프를 개최하는데 그것이 글틴 캠프다. 지지향에서 맞는 두 번째 밤, 나는 1층에서 다른 애들과 서로의 글을 읽고 감상을 나누고 있었다. 글틴에 올린 내 글을 보여줄 때마다 가슴이 떨렸다. 이상했다. 어떤 애도 그랬는지 나보고 왜 그렇게 긴장했냐고 웃으며 물었다.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던 기억이다. 하지만 감상을 기다리면서 왜 긴장이 됐는지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었다. 그날 새벽, 침대에 누워 그것을 생각했다. 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나? 저녁에 괜히 커피를 마셔 잠이 안 온 턱에 온갖 기억이 떠올랐다. 예상외로 내겐 그런 경험이 많았다. 오래간 준비한 과제를 발표하거나,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표를 받았을 때가 대표적이겠다. 그러나 저 두 경험보다 이 글과 화제에 더욱 알맞을 경험이 있다. 바로 사랑 편지다.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마음을 고백하는 사랑 편지 말이다. 재작년에 처음으로 사랑 편지를 쓰고 짝사랑했던 애한테 전해줬다. 전해주며 나는 바로 앞에 있던 그 아이의 눈을 마주 보지도 못했다. 그랬다면 아마 심장이 터졌을 것이다. 결과는 안 좋았다. 친구들은 모르는 사이서 냉큼 고백부터 하기보다는 말부터 걸고 친해지는 게 우선이 아니겠냐고, 뇌는 비상식량이냐고 놀려댔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 얘기를 하자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그 편지를 쓰면서 시간을 들였다는 점이다. 단순히 연필로 편지를 썼던 시간뿐 아니라 어떻게 적어야 할까, 애타다가도 징그럽게 헤벌쭉 웃었던 시간이 그곳에 담겨있었다. 지지향서 다른 애들에게 보여줬던 글도 마찬가지다. 쓰기까지 고민했던 시간, 그리고 썼던 시간 그 정성의 시간이 글 하나하나에 담겨있었기에 보여주면서 나는 긴장했던 것이었다. 편지를 건네며 그리 떨었듯이 말이다. 다시 대전역으로 돌아왔던 날, 마찬가지로 성심당 앞은 긴 줄이 늘어섰고, 사람들 양손에는 빵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때도 잠깐 들었던 의문, 왜 저걸 사려고 한 시간씩이나 기다릴까?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나름의 해답을 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사가는 빵에는 마음과 함께 기다렸던 한 시간이 같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한 시간이 사람에 따라서 가치가 다르겠지만, 적어도 그 선물을 받을 사람에게는 어떤 보석보다 귀하리라 믿는다. 또한 그렇기에 그 선물은 증표이기도 하다. 나는 너를 위해 내
작성일 2025-03-31 작성자 금안백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3상세보기 -
소설 혼잣말월장원 선정
그림자의 삶은 고단하다. 매일 같이 땅바닥에 들러붙어 밟히거나 치이는 것을 반복한다. 아파트 그늘 아래에 숨으면 그제서야 숨을 돌린다. 그와 동시에 하루 종일 햇빛과 가로등 불빛을 받아야만 하는 아파트 그림자가 안쓰러워서, 또다시 착잡한 기분에 빠진다. 나의 주인은 남자다. 대학에 다니면서 일주일에 네 번 아르바이트를 한다. 낡은 반지하에 혼자 살고 있으며 가구는 침대와 소형 냉장고밖에 없다. 식탁 대신 쓰는 골판지 박스는 군데군데 움푹 파여 있어서 용케 아직 뭉개지지 않았구나 싶다. 작고 낡은 미닫이 창문이 하나 달린 좁아터진 방이지만 주인은 별 불편함 없이 지내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가구 밑에 깔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림자에게 입은 없다. 주인은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수가 적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들 앞에서는 꽤 수다스러운 편이다. 어제 강의 듣다가 생각난 건데, 편의점 도시락 가격이 또 올랐어, 국문과 걔네 좀 수상하지 않아?……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다. 주인은 자주 술자리에 간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거침없이 맥주를 들이킨다. 안주는 잘 먹지 않는다. 그 대신 물을 벌컥벌컥 마셔댄다. 의자에 앉을 때마다 다른 사람 엉덩이에 깔리는 처지인 나는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술자리가 끝나기를 빌 따름이다. 주인은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나온 후에도, 주인은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였을 때는 쉴 새 없이 떠들던 입도 혼자가 된 순간 굳게 닫혀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술에 취해 남녀 가리지 않고 어깨동무를 해댔던 주제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잽싸게 샤워부터 한다. 마치 피부에 들러붙은 술기운을 수세미로 벗겨내는 것처럼, 평소보다 많은 양의 샴푸로 머리를 감고 십 분 넘게 비누칠을 한다. 그러고는 끝도 없이 양치질을 한다. 새벽 네 시가 넘어서도 그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 찝찝한 모양이다. 주인은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주인이 언제부터 이런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 한다. 학창 시절에는 술을 마신 적도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도 수다스러운 인간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맞장구를 치고, 누군가가 웃으면 따라 웃는다. 주인은 그런 인간이었다. 그것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더라.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그림자에게는 손목시계를 찰 팔목도, 스마트폰을 넣을 주머니도 없다. 시간 감각은 오로지 낮과 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제야의 종소리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알고 차갑게 식은 아스팔트의 냉기로 계절을 느낀다. 이마저도 주인이 자취를 시작한 이후로는 텔레비전이 없어져 새해의 종소리를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오토바이가 매연을 토하며 지나가는 소리는 이렇게나 선명하게 들리는데, 현실은 고약하다. 반지하 길가는 불쾌한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내게 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자취방에 찌든 곰팡이 냄새까지 맡아야 했다면 내 코는 진작에 기괴하게
작성일 2025-03-18 작성자 배찬빈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11상세보기 -
수필 글틴을 한다는 것월장원 선정
올 연초 글틴 뒹굴뒹굴 게시판에서 김희수, 이형규, 강완 등 소설 게시판과 시 게시판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여러 글티너들을 필두로 ‘글틴 오픈 채팅방'이 개설되었다. 오픈 채팅방 개설소식을 확인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건 글틴을 졸업하고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선노아였다. 1년 전 즈음 선노아와 글틴 오픈 채팅방을 만든 적 있는데, 그 채팅방은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활발한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기 때문에 한달만에 파산했다는 아픈 기억이 나를 건드린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채팅방 역시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너무나도 섯부르게 짐작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너무 궁금하지 않나. 올해와 작년에는 셀수없이 많은 글티너들이 유입되었다. 과연 이들이 정말 과거와 같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들은 글에 대한 열정이 있지 않을까? 이 의심을 무너뜨린건 이형규와 김희수, 강완 모두 장원 수상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글은 동시대 여느 작품들에 비해 고민과 생각이 유려하게 들어있다. 그래서 머뭇거리기를 멈추고 필자 역시 동시대 청소년들과 활발한 담론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오픈 채팅방에 들어갔고, 놀랍게도 그곳에서 선노아, 모모코, 조민준부터 난바다, 데카당, 방백, 눈금실린더, 송희찬 기능사 등, 반가운 이름들을 다시 보며 서로의 취향과 일상같은 사소한 것들을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문학과 예술의 책무에 대한 마냥 가볍지많은 않은 대화들을 이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채팅방의 주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글티너들을 통한 합평과, 글틴에 대한 이야기들- 가령 한땐 멘토님들께서 뒹굴뒹굴 게시판에 자주 등장하셨다거나, 이런 글들이 있었고, 합평을 해달라거나 지금은 어느 게시판의 누구누구의 글이 좋다 같은 것들 - 이 대부분이었는데, 나 스스로 그런 대화문들을 읽어나가며 과연 청소년들에게 글틴이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그렇기에 장기적이지는 않지만 비교적 꾸준히 글틴에 글을 기고해왔던 필진으로서 글틴에 글을 기고한다는 것의 의미를 상정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누군가 글틴의 수식어를 묻는다면 말하고 싶은 건 오직 한가지, ‘국내 유일 청소년 웹진’ 이라는 것이다.‘웹진'이라는 이름 덕분인지 이 곳은 여느 공모전처럼 글을 투고했다고해서 그 글이 폐기되거나 잊혀지지 않는다. 이 곳은 우리가 글을 쓰면 그 글이 힘들게 수확한 비료처럼 밑거름이 되는 곳이고, 또 우리가 쓴 글의 질이 아무리 낮다고해도 그것을 읽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장소다. 뒹굴뒹굴 게시판에서는 활발한 담론들이 이루어지고 커뮤니티가 생겨난다. 이곳에선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할 수도 있고, 한해 동안 기고된 작품들을 꼽아 문학상을 상정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틴은 청소년들이 서로의 미래를 도모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자그마한 ‘문단’. 그 자체다. 많은 청소년 작가(혹은 작가를 지망하는 청소년)들이 등단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글틴은 우리들이 꿈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실제로 이름만 들어도 쉽
작성일 2025-03-18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1상세보기 -
감성&비평 여성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섹스 어필과 노출할 자유에 대한 단상월장원 선정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첨부된 이미지가 정말 중요한 글입니다. 파일 첨부가 안되어서 블로그로 연결된 링크를 달아 두었으니 꼭 이미지와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ㅡ최근 전세계에서는, ‘여성의 노출’이라는 주제가 계속해서 화제에 오르고 있다.202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비앙카 센소리는, 전신을 꽁꽁 싸맨 칸예 웨스트 옆에서 안이 모두 비치는 망사로 된 옷을 입은 채 기자들 앞에 섰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시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여성을 향한 전쟁을 멈춰라’는 구호를 가지고 상반신을 탈의한 여성 시위가 이루어졌다.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성적 외모 강박을 주제로 한 ‘서브스턴스’ 영화가 한국에서 큰 흥행을 이루었고, 일본에서는 여성을 성적대상화한 라면 광고에, 캐릭터를 남성으로 바꾸어 풍자하는 등의 추세가 번지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이, 다 지나가지도 않은 이번달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여성에게 성범죄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성폭행 피해자에게 ‘옷을 왜 그렇게 입었느냐’를 핑계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흔하다. 그녀가 입은 옷, 그녀가 취한 태도, 그녀가 지나가듯이 한 한 마디로 인해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의 가해자는 너무나도 손쉽게 감형을 받는다. 사회는 범죄를 저지른 남성보다 범죄를 당한 여성에게서 먼저 잘잘못을 따진다. 사회는 단 한 번도, 여성을 위해 굴러간 적이 없다. 그것은 오랫동안 남성을 ‘인류(man)’로 기르고, 여성을 ‘여자’로 사육해왔다 며칠 전부터 X(구 트위터)에서는 연예인의 신곡 뮤직 비디오에서부터 시작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여자가 당당히 노출이 과한 옷을 입었을 때, 그것은 여성주의를 후퇴시키는 ‘섹스어필’인가, 아니면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노출할 자유‘인가?여론이 쏟아졌다 뒤바뀌고 서로의 다양한 발언이 정제되지 않은 채 흘러나오는 sns속에서, 나는 많은 고민을 했고, 이 글을 쓴다. 나는 솔직히 말해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노출에 회의적이다. 앞에서 말한 시위를 위한 노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가 곧 ‘상품’이 되고, ’상품의 이미지‘가 유행이 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유행을 오랫동안 가꾸어 여성을 세뇌시켜온 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말이다. 여자 아이는 어릴 적부터 많은 것들을 보고 자란다. 여자에게만 주어지는 꾸밈노동, 면역력에 해가 될 정도로 밥을 줄이면서 얻는 다이어트 강박뿐만이 다가 아니다. 가족 손을 잡고 영화관을 간 소녀들은 아울렛, 지하철 쇼윈도에 전시된 형형 색색의 속옷을 본다. 누가 보아도 과하게 성적 어필을 하는 프릴, 무늬, 리본은 아이들의 뇌에 강하게 새겨지고 그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어린이용, 청소년용 팬티와 브레지어에 달려있는 작은 리본과 프릴. 조금만 얇은 여름 옷을 입어도 리본이 거슬려 불편하다. 그러나 내 남동생의 속옷에는 그런 부속품이 없다. 과한 색상 또한 없다. 신체 특성에 맞추지 않아 딱 붙는 사이즈도 없고, 실제로 숨통을 조여오는 후크도 없다. 가슴 크기를 키우기 위
작성일 2025-03-10 작성자 방백 좋아요 2 댓글수 0 조회수 227상세보기 -
시 목끝까지차올라허겁지겁뱉어낸월장원 선정
1. 이러다가 정말 이대로 죽는게 아닐까 하는 꿈만 두 번째 꿨을 때가 되어서야 자유를 받았고나는 관성인지 뭔지 자꾸만 취한채로 눈을 똑바로 뜨려 하고 소주 반병으로 혀를 재워두고 매일 사진속 나와 즐거움을 겨뤄야 했고 그러다가 2. 글이 세로로 읽혔어 글이 가로로 읽혀야 하는데 글이 쏟아졌어 국지성으로 내렸어 뛰어오면서 외투 안주머니에 꼭꼭 넣어둔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물건의 이름도 같이 잃어버려서 그래서신세한탄을 연기를 머리를 물들인 친구와 같이 뿜으면지나가는 눈들 매우 곱지 못하고 잔상으로 남아서 취한 프레임을 콕콕 찌르고변명은 연구개를 치고 울컥울컥 넘어와서 3. 나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세상은 날 모르니까 세상은 내가 어떻게 컸는지를 모르니까 그러니까 각자의 급소를 가격당하고도 옆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서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렇지 일단 이것부터 아니 위장은 방금 먹은 음식을 품고있는데 나는 그걸 연료처럼 태워서 겨울 거리에서 뿌뿌 연기로 뿜어내면서 걷고 있는데 이 밤거리는 모두 똑같아 시린 공기속 뜨듯한 것이 걸어다니고, -군고구마는 나보다 뜨겁군 드물고, 장하군- 그정도의 감상을 하며 군밤장수 할아버지와 고구마장수 할머니의 뜨뜻미지근한 로맨스를 훔쳐보는 마음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부러 턱을 목도리에 꽂은채 넘어지지 않기위한 걸음으로 걸음으로 4. 지나가는 삶은 자꾸만 아프고 자꾸만 값싸지는데 이제 그만 할 까 그만 둘까 싶다가도 아직 나를 찾는 무언가가 있는데 아니 내가 찾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러니까나는 한여름까지도 장사를 접지못한 붕어빵가게 알바생더러운 거리는 상표가 덕지덕지 붙은채로쪼다들이 걸어다니고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싶었지지금 이거 꿈인가 그런거 말고 5. 둔해진 머리로 생각해봐도 상당히 문제가 있어 문제가 있어 지나간 유년을 고양이 헤어볼 토하듯 해놓은 것을 더 생산하기를 바라는 친구가 옆에 있어 뗀석기 같은 심장에 점 두 개 찍어둔 간격이 한참 멀어졌는데 이 비가역은 어떤 기술자도 못 돌릴 텐데 망가진 기관이라던가 뇌라던가 그런것들이 소주화채 사이에 둥둥 떠다녀 문제가 있지 그래 오늘의 노래를 고르고 빨래를 개는 것 같은 삶을. 몇 백번 몇 천번 반복하는 것이 힘이라니 그 연약한 끈기가 힘이라니... 문제가 있어 묻고싶은건 처음부터 없었어
작성일 2025-02-25 작성자 해강 좋아요 4 댓글수 0 조회수 447상세보기 -
감성&비평 (영화의)집에서 온 소식: 영화와 나월장원 선정
얼마간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기말고사 준비가 한창이었고, 내외로는 연말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정신없이 하루 이틀을 보내니 평생을 함께 할 것 같던 영화와 텍스트들을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었고, 그렇게 영화관에 가지 않은지 어엇 두 달이 넘게 되었다.이따금 구세군종을 울리는 사람들을 지나쳤고, 광화문 광장에서 사랑의 열매탑을 바라보며 아,아, 벌써 이렇게 한 달이 지나는구나, 생각할 뿐이다. 그러다가도 창 밖으로 눈이 내리면 그제서야 어느새 겨울이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영화는 언제 보지, 하는 생각과 함께. 영화가 없는 일상은 내가 없는 일상이었다. 영화란 블랙박스에서 어떠한 사건을 이미지화시킨 후, 그것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화(또는 왜곡)하는 속성을 띄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영화가 인화해낸 시간 아래서 시점과 상황을 바라보며 새로운 사건을 경험한다. 나는 그것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선들과 경험을 마주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가상적 경험을 통해 나를 사유할 수 없었다. 일상에서 시간은 항상 일정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영화를 보던 때의 감각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그렇게 따분하고, 어느 정도 쓸쓸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참에, 오래간만에 휴대폰을 확인하니 내 앞으로 여러 메일들이 와있었다. 대게는 광고성 메일들이었지만, 전부 영화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읽어보니 몇몇은 서독제에서 발송된 영화제 기금 연명메일과 현재 진행 중인 영화제의 뉴스레터에 관한 것이었고, 또 다른 것들은 구독 중인 영화 관련 웹진들과 예술극장에서 온 회원메일들이었다. 글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읽으며, 그곳에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지금은 이런 영화가 나왔나 보군요, 하며 뿌옇게 흩어져가던 영화를 향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는 문득, 이런 내 모습이 꼭 샹탈 아커만이 1975년 만든 장편영화 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 샹탈과 나은 샹탈 아커만이 뉴욕으로 이주하고나서 자신의 어머니와 나눈 편지의 대화문을 중심으로 만든 실험영화로, 이 영화에는 사건이나 인물같은 그 어떤 극적인 요소도 등장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날아온 어머니의 편지를 읽는 아커만의 나레이션과 함께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건물들이 뻗어난 뉴욕시의 단편적인 일상만 보이는 것이 전부다. * 영화 속 보여지는 뉴욕의 풍경 (아무 이야기도 없이 계속 비슷한 쇼트들이 이어진다)영화는 시작부터 ‘가족들은 네가 너무 보고 싶어'라고 (샹탈의 입을 빌려 어머니의 편지 속 한 문장을) 말하지만, 정작 스크린에는 사람 없이 황량한 도로만 보일 뿐이고, 엄마는 계속해서 딸(샹탈 아커만)에게 안부를 묻지만 딸의 답장은 결코 들리지 않는다. 대신 딸을 향한 엄마의 막연한 그리움과 공허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샹탈은 그런 엄마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입으로 읽는다. 딸이 영화 내내 엄마가 자신을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글을 자신의 목소리로 읽는 행위에는, 자연스레 타자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녀(엄마)와 연대/공감하
작성일 2025-02-12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06상세보기 -
수필 커튼콜은 없다월장원 선정
<흰, 꿈>이라는 파일을 하나 갖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시도 수필도 소설도 일기도 아닌 무언가를 끄적인다. 메모장 같은 공간이다. 약 3년 간 그곳에 글을 써왔다. 올해는 자주 이용하지 않았으므로 나의 2년이 담긴 공간이라 할 수 있다.나는 그곳에서 많은 영감을 얻곤 한다. 나의 생각과 느낌이 담긴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글틴에 업로드한 <확신>,
, <흰 벽> 의 전문은 이 파일에서 나왔다. 세 편의 시 외에도 여러 시의 일부 연들은 이 파일에 고향을 두고 있다. 시를 쓸 때 어떤 시어 하나를 고민하는 일도 이 파일 속에서 한다. 마치 탐험하는 것처럼, 너무도 많은 분량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때때로 좌절하고 때때로 기뻐한다. 그런 식으로 내 시 쓰기는 다소 요란하지만 흥미로운 활동이 되었다.이 파일을 지켜보면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도 가늠이 된다. 내가 언어를 자꾸만 분열시키고 있다면 ‘그날은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감각적인 문장도 없이 딱딱하고 차갑게 글을 쓰고 있다면 ‘전혀 시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구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건 최근 후자의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전혀 시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구나.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근 시를 쓰지 않는다.한 달에 한 두 편 정도는 쓰고 있으나 전보다 쓰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는 나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보통 시를 쓴다. 자아성찰에 관해서 쓰겠다고 의도한 것은 아닌데, 시를 쓰다보면 저절로 모든 시어가 내면을 향해있다. 그런데 요즘은 자아성찰을 통한 시 창작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내가 요즘 쓰는 문장들도 시적이고 감각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철저히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쓴다. 습관적으로 시적인 문장을 사용하다가도 금세 문장을 고쳐버린다. 2024년에 들어서 그러한 특성이 나타난 이유를 나는 가만히 고민해보았다. 별 의문 없이 그 답은 바로 나올 수 있었다.세상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내가 한 명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믿고 있던 어떤 상식이 무너져가고 있다. 그것도 처참히. 나는 관심이 없던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덩달아 내 시어들도 날카로워졌다. 나는 문학만큼은 온전하게 문학으로써 집필하고 싶었으므로, 내 언어가 날카로워지지 않았으면 했다. 예전처럼 나의 내면에 집중하고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고민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주성이 몰락하는 현세를 가만히 관찰하면서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문학은 무얼 할 수 있을까? 문학은 무얼 해야만 할까? 평소에는 단순히 즐기기만 했던 문학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알겠는데,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냐고. 철저히 이성적으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나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 답을 알기 위해 자꾸만 시를 썼으나 다소 야멸찬 작품만 나왔다. 또 다시 내면에 집중한다 해도, 특정한 날에 특정한 충격을 받고 단숨에 적어내려간 서투른 시만 나왔다. 성찰과 사유의 깊이로 따 작성일 2025-02-05 작성자 옥상정원 좋아요 4 댓글수 0 조회수 368상세보기 -
시 미신월장원 선정
손가락을 먹게 해줘 소년 A가 그린 바다. 실없게 발음 연습도 했다. 소년 A가 그린 바다 그림. 소년 A가 그린 기린 그림. 소년 A가 그린 기린 그림은 목이 긴가 짧은가. 소년 A가 그린 바다는 긴가 짧은가. 손바닥만 한 이젤인데, 수평선이 펼쳐진 기분. 이런 말은 하기 싫었어. 너도 알겠지만 난 부끄럼이 많으니까. 정말이지. 더웠다. 넌 너무 예쁘고. 나는 까맣게 칠한 손톱처럼 제멋대로야. 여름이 오면 까맣게 칠한 손톱은 태양을 흡수했다. 손끝에 열이 많았다. 자꾸 땀이 나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테레핀 냄새가 나는 미술실. 창문을 열고 붓을 씻으면 졸음이 쏟아졌다. 창문을 열어서 매미 소리가 더 크게 들렸지만 나는 내가 테레핀 냄새에 취해 매미를 씻고 있는 것 같았다. 손끝에서 부르르 몸을 떠는 매미의 몸에 묻은 물감을 닦으면서. 공을 차는 소리, 이리 오라는 호통, 가끔 부는 바람과 텁텁한 땀 냄새. 교복에 묻은 아크릴 물감. 새로 바뀐 쉬는 시간 종소리가 별로고 무섭다는 대화. 시시했다. 오래전에 그린 유화 그림이 굳어가고 있었다. 한 획씩 그리다 보면 소년 A가 곁에 와 어느 세월에 끝내냐며 혀를 찼다. 부끄러웠다. 상관없었다. 어느 순간 나도 소년 A가 본 바다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달하지 못한 세계, 네 옷깃에 묻은 물감 자국, 부풀어지던 눈, 질투, 부러움, 덧칠하다 보면 종국에는 네가 좋다는 말. 네 그림이 좋아.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아. 놀리진 말아줘. 나 들었어. 프랑스로 유학간다고 했지? 그림을 그리는 게 그렇게나 힘이 들고 사랑스럽니. 그런데 난 아니야. 찬송하기 바쁜걸. 반 고흐와 니콜라 푸생.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도 아름답지만. 소년 A…. 나는 미술실 조각상을 전부 파랗게 칠하고 싶어졌다. 데생을 사랑한다는 화가의 말. 나도 그래. 전부 그리고 싶어져요. 병에 걸린 것 같아요. 매미가 온몸을 기어 다니고. 떨려요. 견딜 수 없어요. 그게 뭔진 몰라요, 그냥 다. 르네상스 시대. 종교가 점점 물러났고 사람들은 춤을 줬지. 그럼에도 주의 그림이 남아있었다. 방과후 견학, 미술관의 구석에서 나귀를 타고 걷던 주.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는 여자와 나병 환자. 손가락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에, 들풀에 숨어 손가락을 훔치던 나병 환자. 간절한 마음. 손이 없는 주. 그처럼 나는 내 손가락은 소년 A에게 주고 싶었어. 동시에 먹고 싶었어. 병명을 알려줘. 매미가 울고 테레핀 냄새는 빠지지 않고 공을 차는 아이들의 시큼한 땀 냄새가 불어오는 미술실. 복도 끝에서 나는 물기를 털면서, 네가 좋아. 좋아.
작성일 2025-02-05 작성자 미우 좋아요 2 댓글수 2 조회수 524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