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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눈-
비평 인아영 - 파사칼리아의 거울
파사칼리아의 거울 ―배수아 소설과 음악들 인아영 최초의 소리 배수아의 신작 단편 「눈먼 탐정」(『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 나온다.1) 스스로 탐정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으므로 아마 무언가를 추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추적하려는 것일까. 살인 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간 살인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과 발자국?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끔찍한 비극? 그런데 그는 “뭔가를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232쪽). 그에게는 살인 사건을 파헤치려는 목적이 없다. 대신 그는 뭔가를 보기를 원한다. 아니, 그러나 그는 ‘눈먼’ 탐정이 아닌가.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뭔가를 보기 위해서 눈이라는 시각 기관이 아니라 다른 도구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영혼의 막대기’로, 그의 삼촌이 오래전에 쓰던 물건인데 “수맥의 파장이나 지하 단층의 미세한 진동, 특정 물질의 방사선 에너지”(226쪽)를 감지해서 살인자가 달아난 방향을 추적한다. 다른 하나는 ‘귀’로, 이 청각 기관을 통해 그는 사람과 사물의 사소한 움직임, 동물과 식물의 은밀한 상호작용, 이를테면 돌의 속삭임 같은 것을 감지한다. 눈먼 탐정은 ‘나’에게 말한다. “그 속삭임을 들어 봐”(239쪽). 배수아의 근작들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의미를 가진 어휘들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의미로부터 멀어져 은은하게 울리는 음향들로 가득하다. 말이라기보다는 소리. 언어라기보다는 음악.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들을 읽기보다는 들어야 한다. 미지근한 여름 강물 위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매미 울음, 오래된 동굴의 광물에 축적되어 있는 음향, 짙은 숲속을 달려가는 기차 신호음, 끝나지 않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는 누군가의 발소리. 확실히 해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들리는 이 소리들은 때로는 웅성거림이나 속삭임, 파장이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들에서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거나, 부풀어 올랐다가 잦아들거나, 되풀이되고 메아리치면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것을 보태는 장식이나 에두르는 묘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다른 차원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섬세한 구조물. 「눈먼 탐정」에는 이 아름다운 구조물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체국 앞 우체통에 잠시 멈춘 여인은 우리가 한눈을 파는 사이 한 통의 편지를 재빨리 우체통에 던져 넣었다. 그날 이후 귀에는 최초의 소리가 산다. 묵직한 편지가 어두운 우체통 깊숙이 툭 하고 떨어지던 소리. (230쪽) (강조는 인용자) 지금도 기억나는, 우체통 깊숙이 편지가 툭 하고 떨어진 후에도 오래오래 울리던, 어둠을 닮은 최초의 소리. (234쪽) (강조는 인용자) ‘나’는 자신을 키워 준 젊은 여인이 바닷가 소나무숲에서 우체통에 은밀하게 넣은 편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138상세보기 -
비평 강동호 - 새로움의 경제2 (1)
새로움의 경제2 (1) 강동호 1. 일전에 나는 「문학의 경제학–문학적 ‘배움’과 ‘세대’에 관한 이론적 검토」라는 글에서,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적 관점을 모색하기 위해 ‘문학의 경제’라는 다소 생경한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1) 당시 내가 경제(economy)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문학 작품의 가치’(문학성)가 측정·평가·유통되는 과정을 ‘경제적 현상’에 비유했던 까닭은, 문학 작품을 생산·소비하는 데 관여하는 남다른 교환(exchange)의 원리 및 체계가 상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 역시 경제적 교환의 대상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일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적 교환은 시장에서의 행위를 지시하는 제한된 단어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value)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경제란 특정한 가치 위계 내부의 가치들을 거래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 삶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는 그중 한 부분이다.”2) 누군가가 특정 행위를 시도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비용(cost)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요소(물론 이때의 비용은 금전적 비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가 따르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주체에 의해 어떤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행위의 선택을 통해 얻게 되는 가치의 편익이 지출된 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가 행위의 동기이자 목적이면서 동시에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거나 그에 대한 기대가 교환 주체 사이에서 어긋난다면, 거래는 즉각 중단되고 더 이상 유의미한 교환 행위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한 가치를 거래하는 교환의 네트워크는 삶의 국면들에 광범위하게 편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교환을 원활하게 하고 정당화하는 경제적 원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중이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거래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일상에서의 대화, 사회적 의례의 실천, 문화적 재생산, 심지어는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행위에서도 우리는 특정한 가치들의 거래 현상, 즉 경제적 교환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2.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교환의 양태를 이해하고,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고유한 경제적 체제들을 변별하는 데 있다. 이를테면 욕망의 경제(프로이트), 선물의 경제(마르셀 모스), 숭고의 경제(리오타르), 구별의 경제(부르디외), 권력의 경제(푸코) 등과 같은 개념들은 인간의 다채로운 행위를 관통하는 경제적 논리가 정신분석학, 인류학, 미학, 사회학, 정치학 등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관측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0상세보기 -
비평 김영삼 - 사실은 아주 조금 망했을 뿐이므로
사실은 아주 조금 망했을 뿐이므로 -김지연의 『조금 망한 사랑』이 번역한 ‘반려(종)-되기’에 대해 김영삼 1 한국문학의 숲을 지배했던 우세종으로서의 퀴어 서사는 면역 정치의 배제성(팬데믹)과 죽음 정치(차이 나는 존재에 대한 절멸을 기획했던 정치 기술)의 강박을 거쳐 새로운 관계성의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젠더 권력의 신화에 맞서 퀴어적 친연성에 주목했던 김지연의 서사가 동성 연대(또는 소수자 연대)의 친밀성이 모종의 불안으로 인해 균열되는 순간으로 그 시선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에 없는 소리』와 『조금 망한 사랑』1)의 변별 지점은 김지연의 서사가 퀴어적인지 아닌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겪는 불안의 원인이 다르다는 데 있다. 관습화된 젠더 권력의 얼굴 없는 폭력이 전자의 불안이라면, 소수자끼리의 관계성 파괴 또는 연약한 주체들 간의 관계 위기가 후자의 불안이다. 김지연의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은 이러한 불안의 감정이 연약한 주체들이 새로운 관계성의 레시피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오류와 마주하게 했는지에 대한 보고이자, “우리는-(모두)-여기에-함께-있지만-하나가-아니고-똑같지도 않”2)은 연약한 주체들 간의 차이 그 자체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들이 겪은 사랑과 이별에 대한 김지연의 이야기들은 지워지거나 누락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경유하여 공동체에 공동 거주하고 있는 모든 우리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때 김지연 소설의 미덕은 혐오와 차별에 얽힌 ‘차이 없는 반복’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돈, 불안, 사소한 균열, 약자다움의 감성 등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직면했다는 데에 있다. 2 확장된 의미에서 김지연의 소설이 퀴어적인 것은 그(녀)들의 이야기가 ‘연약한 주체’(주변화, 성차화, 인종화되면서 상징적 자격이 박탈되는 ‘소문자 인간’)들이 경험하는 장면들을 서사화하기 때문이다. ‘대문자 인간’이 생산한 관습과 경계선들을 들춰내고 폭파하면서 그것의 패권을 의문으로 대상으로 만들고 그러한 세계의 문법이 모종의 사건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문제 삼을 때, 김지연의 소설은 퀴어적이고 때로 그것을 넘어 우리 사회 공동체 전체에 대한 사유가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조금 망한 사랑』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동성-이성에 얽힌 관계성을 더 이상 전경화하지 않으면서, 세계와 직접 부딪고 있는 소문자 인간들의 삶의 지속성에 주목함으로써 전진하고 있는 듯하다. 끝끝내 ‘우리’를 떠나지 않는 반려종은 ‘불안’이라는 것, 그 불안으로부터 파생된 서툴기 이를 데 없는 사랑과 이별이 ‘빚’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을 겪은 연약한 주체들이 그 빚의 청산 유무와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8상세보기 -
비평 최진석 - 비평의 딜레마
비평의 딜레마 ― 이론과 문학, 삶의 거리 최진석 1. 이론에 대한 저항 문학비평에 대해 공부할 때, 나 스스로도 매번 고민하고 학생들과도 자주 토론하게 되는 주제 중 하나는 이론의 효용에 관한 물음이다. 이를테면 형식주의나 구조주의, 신비평, 맑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등, 문학비평 개론서나 문학 이론 입문서를 펼쳐 보자마자 쏟아지는 수많은 이론의 홍수에 당황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듯싶다. 더구나 읽기도 어려운 외국 이론가들의 이름이나 전문용어, 특수한 개념 등은 몇 글자 읽기도 전에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얼른 이 ‘수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게 만든다. 설마 이 많고도 복잡한 이론을 다 섭렵해야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일까? 다른 한편, 저 무겁고도 쓰기 어려운 이론이라는 칼에 매혹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쉽게 이해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멋져 보이는 용어나 개념은 작품의 본질을 꿰뚫는 듯싶고, 단순한 감상을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니까. 실제로 어느 정도 길이 들고 나면, 마치 샐러드 먹을 때와 고기를 썰 때 사용하는 칼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어떤 작품에는 이런 이론이 맞고 어떤 작품에는 저런 이론이 적절하다는 판단도 제법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문학비평에서 이론의 효용과 용법을 조금씩 알게 되면, 이론이라는 도구가 손에 맞는 독서의 무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비평에서 이론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문학 독서의 오랜 금언은 역시나 작품 자체에 대한 꼼꼼한 읽기에 있고, 작품 자체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이나 통찰에 있다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충실한 보조가 되어야 할 이론이 어쩌면 독서 자체를 집어삼키거나, 난해한 곡예에 올려놓는 역효과를 내지는 않을까? 그래서 어딘가에서는 이론을 멀리하고 작품에 충실하라는 충고도 곧잘 듣지만, 그것이 문학 독서와 비평, 연구에 다가서려는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이론이라는 무기를 어디까지 신뢰하고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을까? 아니, 문학비평과 연구에서 이론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론은 꼭 필요할까? 아마도 비평과 연구라는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이 같은 의문은 종내 풀릴 것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한 번쯤 다시 돌아보는 것은 여러모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비평과 이론의 딜레마에 대한 자기 정리이자 설득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2. 형식주의와 리얼리즘의 역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1896~1982)은 청년 시절인 1910년경 ‘모스크바 언어학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시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젊은 시인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같은 시기에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시어연구회(OPOYAZ)’가 결성되었으며, 두 학술 모임은 후일 ‘러시아 형식주의’라는 학파로
작성일 2025-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21상세보기 -
비평 안지영 - 고통을 견디는 연습: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기
고통을 견디는 연습: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기 안지영 1. 그날 광화문에서 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너는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사관이 여기 있었네”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보고 너는 그것이 팔레스타인 대사관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옆에서 너의 말을 들은 친구는 말했다. “아 여기, 그 우크라이나 대사관이야. 그, 전쟁 난 곳 있잖아.” 너는 “아” 하고 잠시 멈칫하다 말 잇기를 그만두었다. 사실을 정정하는 너의 말이 친구를 비난하는 투로 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쌓여 왔던 너의 분노를 잘못된 대상을 향해 터뜨릴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너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래도 말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팔레스타인에 대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렸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면 이 이야기를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그 참혹한 비극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비극의 무게를 함부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1)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집단 학살에 더 가까운 것이니까.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느린 죽음(slow death).2) 트위터에 팔레스타인 관련 소식을 팔로잉하며 너는 거의 매일 폭격받는, 울면서 호소하는, 폭탄에 맞아 피 흘리는, 기아로 온몸에 거죽밖에 남지 않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신생아에 가까운 죽은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하얀 천에 쌓인 시신들. 학교, 병원, 재활센터를 공격하며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고도 제지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의 절망.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며 경악하다가 어느 때는 담담하게 스크롤을 올리다 어느 순간에 울음이 터져서 창을 닫고. 그러다 다시 켜서 그걸 다시 보고 기도했지만 결국 깊은 무력감에 빠졌었다. 어쩌면 팔레스타인에 대해 일상에서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바닥, 절대 악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것의 막막함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에 꺼내고 난 이후 다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너의 입을 닫게 만든 것이다. 아니, 너는 그저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을 영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너는 그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학하듯이 그것들을 보며 끊임없이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팔레스타인 문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2. 계엄이 선포된 이후,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밤중에 자다가 깨어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 영상을 보았다. 헤드폰을 끼고 바닥에 누워 네, 다섯 번을 반복해서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죽은 자들과
작성일 2025-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12상세보기 -
비평 서은영 - 악녀들
악녀들 서은영 1. 악녀 선언 ‘두고 봐,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분명 상대를 향한 경고성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 말에 겁을 먹기보다는 ‘두고 보면 네가 어쩔 건데’라는 류의 무시로 응수되는 경우도 흔하다.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게다. 가만있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그런 발언이 필요한 상황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한들 조용히 응수하면 될 일이다. 곧 이 발언은 자신의 분함과 억울함을 행사할 방법을 좀처럼 찾을 길 없는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말이자, 그런 약체의 다짐이다. 그러나 복수는 하고 싶지만 복수의 길은 요원하고, 현실의 나는 힘이 없다. 대신, 고구마를 먹고 목구멍이 꽉 막힌 현실의 나와는 달리 통쾌한 복수혈전을 실현하는 그녀들이 있다. 바로 로맨스 판타지 속 악녀들이다. 악녀들은 버릇처럼 되뇐다. ‘이번 생엔 기필코 살아남겠다’고. ‘두고 봐,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의 악녀판 버전이다. 달라진 나를 보여 주겠다는 결기이자 나의 독기를 끌어올리는 주문으로 들린다. 2010년대 이후 여성들은 웹콘텐츠 소비에서 굳이 악녀들을 소환했다. 일종의 ‘악녀-되기’의 선언이다. 될 게 없어 악녀가 되느냐고 하겠지만, 그렇다. 악녀가 되지 않으면 사회적 죽음, 혹은 실존적 죽음이 도사리는 비정한 세계를 경험했기에 당하고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악녀 선언은 로맨스 판타지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일상툰인 〈퀴퀴한 일기〉에서는 “니가 애매한 나쁜 년이라 마음이 무거운 것이야. 더 나쁜 년이 되도록 하여라”고 조언하고, 〈쌍년의 미학〉에서는 말 그대로 ‘쌍년-되기’를 충고한다. 일련의 악녀 선언이 페미니즘이 재발화된 2015년 이후 본격화했다는 점은 여성들이 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재정립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 목소리들이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현현된 것이 바로 악녀이자 #악녀물이다. 악남(惡男)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악녀 선언은 흥미롭다. 〈악녀는 마리오네트〉의 레제프나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의 아버지, 〈재혼황후〉의 하인리를 우리는 악남이라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폭군이자 패륜아 같은 이들은 악인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악남이라 호명하지 않는다. 그들을 명명할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역대급 영지설계사〉의 김수호가 빙의한 인물 ‘로이드 프론테라’도 악남이 아니라 ‘개망나니’일 뿐이다. 악남은 없다. 악녀만 있을 뿐이다. 악녀란 일찍이 남성들을 위협하는 여성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상한 것임을 안다. 악녀의 대척점에 겨우 개망나니가 존재하는 세
작성일 2025-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19상세보기 -
비평 최진석 - 문화와 국가의 가장자리에서
문화와 국가의 가장자리에서 ―검열과 복종, 혹은 비평의 장소 최진석 1. 표류하는 현재, 폭력의 가시 2025년 1월 19일 현재, 한국 사회는 격랑 위를 떠다니고 있다. ‘선진국’이자 ‘문화국가’라는 호명을 받아들인 지 수년 만에 벌어진 이변이 아닐 수 없다. 계엄과 탄핵, 그에 대한 헌법적 판단 절차가 한창 진행 중인 지금은 그 누구도 미래를 예단하기 힘든 불확정의 시간만이 흐르는 중이다. ‘현재’라는 좌표가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에 놓일지 짐작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문학과 문화, 비평에 관한 이야기는 짐짓 사치스럽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이든, 지금-여기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파도의 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예측할 수 없어도, 최소한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는 스스로에게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도착에 대한 기대나 불만, 감동이나 좌절, 혹은 두렵지만 새로운 출발도 가능할 테니까. 지금의 사태와 문학장(場)을 연관 지어 말한다면, 아무래도 2023년 6월 14일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문학과 출판 시장의 현황을 널리 알리는 국제적 행사의 홍보대사로 소설가 오정희가 위촉된 것에 대해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와 블랙리스트이후(준) 등이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개막일 행사장에서는 송경동 시인 등이 반대 의사를 밝히다가 강제로 끌려 나갔던 사건이 그것이다.1) 알다시피 오정희 소설가는 박근혜 정부 시절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깊이 연루된 문인이었고, 그에 대한 분명한 사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시금 한국문학과 출판을 대표하는 행사의 얼굴을 맡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2) 블랙리스트, 즉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의 불길한 기운이 다시 한국문학을 뒤덮으리라는 불안과 공포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돌아보면 최근 2년 사이에 문화예술 창작에 가해진 검열은 수없이 많다. 2022년 5월 13일 광주광역시의 ‘호명(呼名) 5‧18거리미술전’에서 보조금 지원사업의 취지를 빌미로 후원이 취소된 것이라든지, 같은 해 9월 26일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이 기획한 행사에서 가수 이랑의 노래가 배제된 것, 그로부터 며칠 후인 10월 4일 한국만화진흥원이 주최한 ‘전국 학생 만화공모전’에서 〈윤석열차〉의 의도를 문제 삼아 엄중 경고가 내려진 것 등이 그 출발점이다. 2023년에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비판하는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취소되거나 지원 배제당했고, 2024년에는 도서관에 비치된 성평등·성교육·페미니즘 도서 2,528권 폐기되었으며, 영화진흥위원회의 차세대 미래 관객 육성 사업에서는 정치적 이념 문제가 조건으로 내걸리기도 했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떠올려도, 최근의 시점까지 검열이 작동했음을 확인하기에 모자라지 않다. 하지만 곧장
작성일 2025-02-01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429상세보기 -
비평 김지윤 - 계속해서 아픔에 대해 말하는 어떤 일상적인 방식
계속해서 아픔에 대해 말하는 어떤 일상적인 방식 김지윤 1. 치유라는 폭력 “모두가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할 거야 당신이 아프면··· 만일 당신이 낫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병에 걸린 것만 아니라면.” 다니엘라 올셰프스카의 시 「thirteenz」의 한 구절이다. 타인의 병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쉽게 던지는 말은 “빠른 쾌유를 빕니다”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은 가능한 한 빨리 치유되어야 하는 것,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병은 이상 징후이며,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상성과 수치심의 구조를 형성한다. 하지만 나을 수 없거나, 낫는 데 매우 오래 걸리는 경우라면 어떨까? 아픈 것이, 불완전한 것이 그냥 삶의 일부라면? 『눈부시게 불완전한』에서 장애 및 트랜스 활동가인 일라이 클레어는 ‘치유’라는 말에 숨어 있는 정상성에 대한 강박에 도전한다. 세상은 복잡하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눈부신 불완전함’도 충분히 가능하다. 불완전한 상태나 질병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 누군가의 삶이라면 ‘치유’에 대한 기대를 들이미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 난치병이나 낫지 않는 병은 ‘치유’를 전제하는 기존의 ‘정상성’ 서사를 거부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고통과 한계 앞에서, 완전성과 진보를 추구하는 사회적 이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극복이라뇨, 받아들인 거죠.” 최은미 소설 『마주』에서 비활동성 결핵 판정을 받고 코로나 상황에 결핵 치료를 받는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극복이 아니라 수용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질병이 낫지 않고 계속된다는 사실은 삶을 선형적 발전 과정이 아니라 고통과 불완전성을 동반하는 상태로 바라보게 하며 삶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청한다. 최근 ‘치유’ 서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들이 대두되고 있는데,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질병을 인식하기보다는 상처와 고통 자체를 존중하는 접근법이 강조되고 있다. 고통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존재를 깊이 사유하게 하는 계기로 인식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질병은 생존뿐 아니라 공감과 공존의 문제와 연결되며 인간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편견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다. 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구조,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하므로 사실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에 대한 성찰은 새로운 윤리적 책임과 공감의 계기를 제공하며 질병에 부과되곤 하는 낙인과 배제의 문제를 재고하게 한다. 김은정의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후마니타스, 2022)은 한국의 역사, 정책, 제도, 문화 텍스트 등이 장애와
작성일 2025-02-01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594상세보기 -
비평 김준현 - ○○지역 밖에서 삶
○○지역 밖에서 삶 김준현 * 최근 내가 살고 있는 읍내에 있는 지역특산물 홍보관에 대해 한 지역신문의 기사를 접했다. 2022년 12월 준공된 이 홍보관을 두고 “24억 원짜리” “공중화장실로 전락”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 기사의 제목은 다소 자극적일지언정, 내가 보고 겪은 그 건물에 대한 감상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이 홍보관은 완공이 된 이후에도 2년이 넘도록 개관을 하지 못했다. 보도 자료에 따르면 홍보관 전망대가 바로 맞은편 아파트의 사생활을 침해할 뿐 아니라 건물의 붉은색이 반사되어 민원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2025년 1월 초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에도 홍보관 건물은 여전히 주민들에게 별다른 효용이 없는 채로 방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저출산의 현실에서도 이 읍에는 꽤 많은 영유아들이 보인다. 주거 지구치고는 아파트 가격대가 인근 광역시의 학군이 발달해 있는 도심에 비하면 낮게 형성된 편이라 신혼부부 인구와 미취학 아동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그러나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의 도서관이 없다. 시(市)의 경계를 넘어 인근 광역시의 구립 도서관으로 가거나,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이십 분 정도는 가야 시립 도서관에 갈 수 있다. 몇 년간 무용지물이었던 저 홍보관이 지역특산물을 홍보하는 데 쓰이기보다는 도서관으로 쓰였을 때 이 지역에 더 많은 미래를, 어린이들의 삶에 조금 더 나은 뭔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언제나 나이브한 생각이 된다. 행정이 있고 적법한 절차가 있고 최초의 목적이 있어서 준공되었을 저 건물을, 한 개인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 최근 일련의 정치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시민이 시민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현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순진한 것임을 보여주는 현실. 이해 바깥의 것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현실. 단적이고 지엽적인 사례 하나를 가져오긴 했으나, 지방의 현실이 고답적인 구조나 형식의 쇄신을 도모하는 것-변화나 혁신을 꿈꾸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편리한 세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구가 줄어드는 소규모의 도시는 청년들의 정착을 위해 지원 사업을 펼친다. 재미있는 것은 일부 지원 사업의 대상이 애초부터 해당 지역에 거주해 왔던 청년들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부터 유입되는 청년들인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자체는 예술가 레지던스나 청년 창업 자금의 지원 등으로 손실되는 청년 인구를 외부로부터 충당하고 보완하려고 한다. 사람이 아니라 인적 자원을 획득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적 자원으로서만 유의미한 사람들이 과연 소속감을 느끼며 지방에 계속 머물지는 미지수다. “저런 놈팡이 같은 놈들이 나랏돈을 다 빼먹는다니까.” “멀끔하게들 생겼는데 어딜 봐서 놈팡이고.” “예술가라잖아. 맨날 놀고먹으면서 예술가랍시고 나랏돈 타 먹는 거다. 먼저 먹
작성일 2025-02-01 작성자 문장지기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748상세보기 -
비평 최진석 - 시대와 응답
시대와 응답* ― 한강과 90년대 문학의 (비)정치적 감수성에 관하여 최진석 1. 감수 능력과 문학 2024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롬의 콘서트홀에서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그 주인공은 한국의 소설가 한강.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여러 작품 중 『소년이 온다』를 대표적으로 거론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평가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통의 참화를 세계 시민들의 보편적 공감으로 끌어올린 문학적 성취에 관해서는 앞으로 끊임없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에 벌어진 사건, 즉 광주의 역사로부터 44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계엄이 재연되었다는 점에 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 사태의 정치·사회적 후폭풍에 대해서는 일단 말을 아끼자. 지금은 한강의 문학적 성취가, 더 정확히 말해 ‘노벨상 수상’보다는 작품 세계를 통해 표현해 낸 ‘문학적 울림’으로서의 성취가 어떤 토대에서 나온 것인지, 작가 개인의 재능을 넘어서 어떤 시대사적 배경으로부터 발아한 것인지 묻는 것이 더욱 유익할 성싶다. 만일 그것이 작가의 개인적 재능에 전적으로 기인했다면 우리는 그에 더 보탤 말이 없다. 하지만 이로부터 한강으로 상징되는 한국문학의 ‘높이’나 ‘폭’을 운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뿌리를 내린 문화적 감수성의 토양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감수성이란 묻기 어려운 주제이다. 그것을 가시화하는 여러 지표를 선택하고 분류하는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도대체 감수성을 정의하고 실체로서 규정짓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객관성과 실증성이 신뢰의 유일한 담보물이 되는 우리 시대에 주관성과 모호성으로 둘러싸인 이 감각의 구성물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쩌면 감수성이란 실물을 통한 증명의 문제라기보다 그에 다가서는 자가 감수(感受)하여 공명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경험은 아닐까?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글쓰기를 실천해 온 한강과 그의 시대는 이 같은 공감적 경험의 지평선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70년대생 작가들은 90년대에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문학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1970년생 한강의 경우 93년에 시로, 94년에 소설로 등단했다. 그럼, 9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알다시피, 그 시기는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직후이며, 민족‧민중문학으로 대변되던 이전의 흐름과 ‘다른’ 의미에서의 새로운 문학이 모습을 드러내던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명시적인 사회‧정치적 의제가 문학장에서 빠져나가고 보다 자유롭고 유쾌한 감성으로 충전된 ‘문화의 시대’가 그때의 시대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말이었다.1) ‘서태지와 아이들’, ‘무라카
작성일 2025-0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797상세보기 -
비평 김유림 - 비정상 사회, 역사가 쓴 시대의 시놉시스
비정상 사회, 역사가 쓴 시대의 시놉시스 김설원 「팔월극장」 김유림 1. 불가능한 연출 정상과 비정상 사회를 구분하긴 사실상 어렵다. 기준을 찾는다면 역사일 것이다. 역사란 과거이며, 과거는 현재 시점으로 소환될 때 의미가 있다.1) 역사에 내재한 의미는 비정상과 정상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하다. 헤겔은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 집적된 현상을 추론하고 검증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 ‘절대정신’에 이르기를 주문한다.2) 절대정신은 역사 변증법을 거쳐 ‘앎에 이르는 자기 인식’이다. 자기 인식은 ‘자유의지’와 동일한 의미로 억압을 벗어날 때 실현된다.3) 문학을 포함한 예술, 철학 등 인문학이 역사를 검증하려는 노력도 자유의지, 주체적인 인간의 실존을 강화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김현 평론가는 ‘문학이 억압하지 않지만,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4)라고, 적시한 바 있다. 이는 문학이 결코 유희적이거나 감상적 산물이 아닌 억압당하는 인간의 실존을 복기하는 장르임을 알린다. 김설원5) 작가의 단편소설 「팔월극장」6)은 2024년 현진건 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비정상 시대를 밀도 있게 다루면서도 미학적인 감응이 풍부한 작품이다. 특히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4‧19 역사를 덧입혀 주목된다. 「팔월극장」은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는 화자 영진을 중심으로 연기자를 꿈꾸는 윤희,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영진의 엄마와 여동생이 등장한다. 영진은 엄마, 여동생과 함께 지방 도시에서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홍보 인쇄물 제작업체에 취업하지만 ‘생존 활동’에 불과한 일에 회의를 느끼고 직장을 그만둔다. 직장을 그만둔 영진의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 여부가 물음으로 확증된다고 밝힌다.7) 영진은 육체 보존 목적뿐인 삶에 왜? 라는 물음을 던진 것이다. 푸코는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구현하는 행위를 심지어 ‘예술 행위’로 규정했다.8) 영진은 육체만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자기 세계를 찾아 고향을 떠난다. 학원에서 연출 전공 강좌를 수강하고 운 좋게 영화제작사에 들어간다. 영화(제작, 연출)에 매진하지만, “성질이 더욱 고약해진 ‘가난’과 마주쳐야 했다.” “자부심이랄지 성취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한숨과 카드 빚만 늘어 가는 생활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25쪽) 영진은 물질이 지배하는 비정상 시대에 억압당했다. 생활고에 엄마의 죽음이 포개지면서 영화감독의 꿈은 와해 될 상황에 직면한다.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여동생이 문자메시지로 임종 소식을 알렸다. 새벽 한 시가 막 넘어선 때였다. 휴대전화에 찍힌 부고를 보는 순간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맥주에서 지린내가 난다고 공연히 신경질을 부렸다. 부주의로 내 어깨를 슬쩍 건드리고
작성일 2025-0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660상세보기 -
비평 이성민 - 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 『사랑의 꿈』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함께 읽기1) 이성민 1.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 모더니티를 역사 속에서의 위치 상실로,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망각해 버린 시대”2)의 지배적 징후로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어떤 근본적인 단절이 우리 시대와 그 이전 사이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이전과 같은 역사적 방식으로는 우리가 어떤 시공간 속에 위치하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제임슨의 어법을 따르자면 포스트모던 감각은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표출되는데, 이를테면 깊이의 상실과 역사성의 쇠퇴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시간예술의 통일성 와해가 이에 해당된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시간성의 와해 이후의 예술, 즉 공간성이 점점 더 지배적인 문화 논리가 되는 예술 형식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부터 읽어 내고 있다.3) 포스트모던의 하이퍼스페이스는 우리로 하여금 공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을, 완전히 균질해져 버린 탈역사의 공간 내부를 영속적으로 떠도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우리는 이제 방향감각과 목적(telos)을 상실한 채 무한한 패스티시만이 잔존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 같다. 상술한 시대감각을 하나의 전제로서 미리 염두에 둘 때,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이 우리 앞에 출현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4) 물론 각 개인은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하나의 좌표 위를 점유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월가 점령 이후의 ‘신냉전’ 시대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질문하는 위치는 그러한 3인칭 좌표의 개념이 아니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하나의 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 실존의 1인칭 관점에서 올바르게 보았을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이 속해 있는 1인칭 좌표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려 할 때, 그런 시도는 곧바로 난관에 봉착하며 미궁으로 좌초되고 만다. 나를 살게 하는 것들과 내 행위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들의 연쇄는 너무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데, 바다 건너편에서 발생한 가뭄이 선물시장의 원두 가격 상승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거미줄처럼 얽힌 시장-신의 불가해한 변화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연기(緣起)는 축자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내 위치, 내가 나아가는 하나의 화살표, 나를 형성하는 기억과 기대의 교차점은 지구 전체와의 공동 실존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지구를 실존의 토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가 지구 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감히 사유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미 말했듯 올바르게 본다는 것의 문제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나 자신의 실존, 나의 시공간이 속하지 않는 담론의 역사, 실존과 담론 바깥에 있는 실재적인 것의 작용을 함께 사유할 때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존-담론-실재의 이음새를 엮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처럼 느껴지고, 나를 살게 하는 무한한 연쇄의 무게 앞에서 사유는 한없이 무기력해
작성일 2025-0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771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