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시
문장의 시선-
시 김지윤 - 틱-택-토
틱-택-토 김지윤 당신은 O와 X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O를 고르는 순간 상대는 X가 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 상대는 당신에게 결코 닿을 수 없다 상대를 막고 대립하라 모든 선들이 일어나 벽이 되도록 당신의 길은 상대에겐 벼랑 O와 X는 같은 칸 안에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의 세계엔 칸수가 정해져 있으니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라 참 멋지네요, 그렇죠? 당신은 승리하고 싶어요. 그렇죠? 이것은 O와 X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O를 골랐다 당신은 계속해서 칸을 채울 수 있다 빈칸이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 그러나 당신이 이긴다는 뜻은 아니다 둘 다 지게 되는 경우가 흔한 게임 너무 작은 세계의 너무 단순한 규칙 당신들은 서로 지나치게 닮았으므로 반복해도 결과가 비슷할 것이다 한 수를 잘못 두어도 다음 수가 남아 있지만 당신은 상대를 방해하느라 정신이 팔려 번번이 기회를 놓쳐 버린다 당신은 규칙을 바꿀 수 있지만 정녕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5상세보기 -
시 김지윤 - 파레이돌리아
파레이돌리아 김지윤 어떤 결정은 문을 등진 채 해야 한다 길이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이다 흩어진 구름의 문양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림자의 속삭임을 알아듣는다면 어두워져 가는 시간도 그리 지루하진 않다 모든 물방울들이 거울이 되어 내가 되기 전의 내가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내가 그 안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흘러야 할 것은 흐르게 하자 괜찮아, 라는 말을 버리고 싶은 날 종말 한 시간 전 꼭 해야 할 말처럼 삼킬 수 없는 언어가 있다 참을 필요가 없는 재채기처럼 좀 헛되이 다급해져도 좋다 비 내린 후에 다시 비가 오고 땅이 마를 틈 없이 젖게 놔두자 진흙 위 남은 발자국들이 지나간 걸음의 무게를 기억하듯이 어떤 슬픔은 형태를 만들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단단한 테두리를 그려 놓는다 부서진 마음도 마음이다 잃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는 게 오늘의 희망 길이 없는 데선 별을 더 자주 바라보게 된다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9상세보기 -
시 이원석 - 택시
택시 이원석 새벽마다 나를 태우려는 택시가 집 앞을 지나갑니다 나는 타지 않습니다 하지만 타고 있습니다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택시는 밤거리를 달립니다 기사는 라디오를 켭니다 채널이 한 바퀴, 두 바퀴 돌기 시작합니다 치익-칙 한곳에 머물고 음악이 흐립니다 비가 옵니다 와이퍼가 작동합니다 소매로 우는 아이처럼 빗물을 닦습니다 기사는 어디까지 가는지 묻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 가고 싶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아니 현실입니다 아니 꿈입니다 아니 마음입니다 차가 멈출 때마다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됩니다 기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봅니다 아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누군지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빨간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택시가 나를 내려 줍니다 높고 긴 벽을 끼고 돌아 언덕 위입니다 멀리서 한 사람이 올라옵니다 당신이 맞습니다 당신에게는 내가 맞습니다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합니다 당신이 가까이 옵니다 나는 손을 내밉니다 당신이 내민 손을 바라볼 때 택시가 옵니다 집 앞에서 택시가 나를 지나칩니다 당신이 타고 있습니다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8상세보기 -
시 이원석 - 겨울 편지
겨울 편지 이원석 날이 매우 추워 독감이 유행이래 한번 걸리면 일주일을 아프다고 했어 로이는 전자식 자연관찰소에 박제되어 있으니 가끔 만나 보러 가도 좋을 거야 다행이다 그치 고통도 수치도 망각하고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 멈춰 있을 테니 시간을 탈각시킨 고통은 중심을 잘라 얇게 저며 낸 뇌의 단면처럼 아주 잠깐이자 영원일 테니까 플래시처럼 터지는 한순간의 고통이 영원의 기억 속에 끼얹어져 그걸 불러일으킨 존재를 쉼 없이 재생시키고 있을 거야 행복하게 그가 떠나기 전에 내게 메시지를 남겼는데 읽어 보지 않았어 타이레놀과 알코올은 함께 먹으면 안 된대 〈Duo showdown〉은 잘 읽었어 둘의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아주 세세한 것까지 그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일로 돈을 벌고 어디에 집을 얻었는지 사는 곳 근처에 차이니즈 레스토랑은 있는지 아직도 양장피를 좋아하는지 그 둘의 친구 이야기와 우리의 맹세와 어릴 적 이야기까지 하나하나 생각하다가 보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고 그러면 너는 거기 가서 너의 슬픔을 위해 울 수 있을 거야 전자식 자연관찰소까지 찾아와 로이를 만나 줘서 고마워 아마 로이도 조금은 외롭지 않았을 거야 -This is Roy. I sent you a reply, over. -I'll run to you, Roy··· over. -This is Roy, copy.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9상세보기 -
시 김병호 -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면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면 김병호 베란다 한켠에 죽은 화분이 있습니다 겨울 내내 숨을 내놓는 동안 어찌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어둠은 여기서 피어나 끝없이 나를 두드리고 서성이는 먼 걸음을 흉내 내었습니다 숲이었다가 詩이었다가 당신이었다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면 가만히 빛나며 꿈틀거리는 가장자리를 후회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화분같이 깊은 구멍 속에 산산이 흩어진 눈동자 나는 그게 달 같아서 홀로 키운 마음 같아서 내내 가까스로의 날로 지웠습니다 여러 빛들이 겹쳐 봄을 흔들고 나는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베란다 창 가득 홀로 지운 마음처럼 발자국이 생겼습니다 간곡한 마음도 없이, 조심한 마음도 없이 부르면 다시 돌아오는 이름처럼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3상세보기 -
시 김병호 - 자꾸 먼 곳을 보는 버릇
자꾸 먼 곳을 보는 버릇 김병호 이월 마지막 날에 내리는 비는 끝도 시작도 없는 것이어서 어디 물어볼 노릇도 없다지, 이런 밤의 귀신은 정도 많아서 이웃이라도 되려나, 길가 눈먼 돌멩이에게 비는 마음 낭떠러지 시커먼 파도에 비는 마음쯤은 밤새 겨우 버려지려나, 누군가는 돌아오고 누군가는 떠나가는 밤이어도 나는 돌려줄 게 없지, 어찌할 수 없는 일들만 가득하지 언젠가 나도 봄에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 따라다녔지, 할 수 있는 일은 아프고 다정하게 기꺼이 毒으로 살아가는 일, 오늘은 숨을 데가 없어 불현듯 생을 빠져나갈 수 없는 밤, 각자의 형편을 지우고 봄이 되어서도 겨우 떠나는 마음을 다 헤아리진 못하지, 서둘러 일어난 자리처럼 아침이 오면 울 것 같은 마음이 생기려나 틀린 마음은 아니지만 밤이 지나면 떼어낼 수 없는 내막도 다정해질까, 네가 지닌 밤 중 두어 밤은 온전한 나의 몫이 될까, 오늘은 귀신들과 다정해지는 일이 무난하겠다,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나는 지나가겠다 이런 밤이 네게도 있었을까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4상세보기 -
시 정끝별 - 너는 다만 나는 그만
너는 다만 나는 그만 정끝별 모니터에서 눈을 떼면, 잠시 잠이 왔다 난방이 안돼 전기담요 밖으로 내뱉은 네 숨이 나갈 곳을 잃고 모서리에 내려앉아 푸른 꽃을 피웠다 잠시 잠에서 눈을 뜨면, 다시 모니터에서 떼지 못한 눈에서도 나갈 곳을 잃은 물이 샜다 푸른 꽃이 더 푸르렀다 냉동 볶음밥에 다른 세상의 온도를 불어넣고, 너는 다만 늘 푸른 모니터로 하라는 거 다 하고도 여전히 여기에요 하지 말라는 거 다 하지 않, 았, 는, 데, 도, 다른 날이 떠오르지 않아서 다른 퀘스트가 떠오르지 않아서 문을 열고 나가면, 걸음걸음이 돈이다 아니 돈벼락이다 세상에는 눈이 너무 많아 눈치를 보게 된다 행운이 아니 돈이 너무 적어서다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전도사일까 의심이 든다 그러니 날씨가 좋은 날엔 빛을 불러들여선 안 된다, 안 되니 잊은 것들에게도 잊혀진다 모자와 마스크 속에서 또 안 되겠죠? 집 밖을 나가면 사람들로 식은땀이 흘러요 눈사람처럼 흘러내린 물 자국들을 사람들이 눈치챌까요? 그러니 못 본 척 오늘도 못 들은 척 엎어 놓은 깔때기처럼, 바닥이 없으니 내려갈수록 심해다 그냥 혼자고 매일 혼자라는 닿지 않는 푸른 수압에 숨이 차다 아니 짜다 네잎클로버를 구매하려는데, 한도액 초과라며 거절하는 신용카드에 베인다 아무도 보지 않는대도, 납작해진 넙치랑 나란하다 나는 그래도 너랑은 튀르키예 검은 장미 아이스크림은 꼭 먹어 보고 싶은데, 언제 나만 혼자는 그만?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0상세보기 -
시 정끝별 - 캐리어 걸
캐리어 걸 정끝별 캐리어를 끌고 길 위를 네일로 매일을 내일로 화요일에 인-서울 해 목요일에 탈-서울 하는 너는 편도 2시간 거리 소도시에서 자영업 하는 부모님과 고3 동생과 산다 캐리어의 생명은 바퀴 길 위에서 튀는 바퀴의 비명이 매일을 끌고 낮에는 강의실 도서관을 오가며 편의점 패스트푸드점에서 잠깐잠깐, 하루 한 끼는 꼭 학식을, 밤에는 24시 도서관 열람실 스터디 카페 아니면 찜질방에서 컨베이어 길을 벗어난 캐리어가 파손되는 건 순식간 토요일 아침에 인-서울 해 대치동 학원과 24시 맥도날드를 오가다 일요일 저녁에 탈-서울, 그렇게 공부해 인-서울 대학에 합격했는데 팬데믹이, 다시 너는 캐리어를 끌고 인-서울 캠퍼스와 탈-서울 집을 간헐에서 정기로 캐리어의 안전은 강도와 잠금장치가 캐리어의 가치는 경도와 크기가 보장한다고 졸업을 유예한 너는 인-서울과 탈-서울을 오가며 아직 캐리어를 끌고 기타 등등의 커리어 케어를 캐리어에는 끌어당겨 대출한 삼색 고양이와 초록 바질과 사원증과 원룸 비번이 있으니 지치지 않는 내일과 지지 않는 매일을 캐리어에 끌고 커리어가 너를 인-서울에 체크인 해 줄 때까지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9상세보기 -
시 진은영 - 망각
망각 진은영 유실물을 찾으러 갔는데 무얼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사랑을 했었는데 누굴 사랑했는지 모르겠다 증오심이 머릿속을 이처럼 기어다녔는데 그래서 여기는 어디인가 세 나라가 만나는 지점에, 증오와 슬픔과 사랑의 국경이 모여든 지점에 내 자아가 살았다 분쟁이 잦았다 시는 입천장에 설탕 부스러기보다 작은 별들을 뿌린다, 나는 별들이 혀로 떨어질 때 느껴지는 그 어렴풋하고 슬픈 달콤함이 좋았다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5상세보기 -
시 진은영 - 이별의 직유
이별의 직유 진은영 지나가는 곳은 매번 달랐지만 양옆으로 붙은 두 개의 녹색 기차 좌석처럼 우리 둘은 붙어 다녔잖아 펼쳐진 책의 좌우 페이지처럼 의견은 달랐지만 늘 같이 있었잖아 흰 비행기에서 동시에 불을 뿜는 두 개의 엔진처럼 같은 일들에 분노했잖아 우리는 오전과 오후처럼 완벽한 하루였잖아 하나의 옷에 달린 단춧구멍과 단추처럼 우린 다른 모양이지만 이어지고, 꼭 맞는 열쇠 구멍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유쾌했었잖아 어디로 향하는 문인지도 모르면서― 어디서 떨어진 단추인지 잊어버렸잖아, 문이 열리자 너는 가 버렸잖아 백합은 꽃, 기린은 동물, 오렌지는 과일, 에펠은 탑이고 죽음은 잠긴 문, 단 한 번 열리는 영화 속에선 헤어진 연인이 반지를 멀리 강물을 향해 던지잖아 약속은 더 먼 곳으로 던져질 뿐 깨지는 것은 아니라서, 심해로 흘러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빛나면서도 반지는 기다렸잖아, 우리의 약속이 지켜지기를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1상세보기 -
시 권창섭 -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 권창섭 그는 심심하다 세상은 그가 없이도 너무나 잘 돌아가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인사를 받아주는 일일 뿐‧‧‧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것일 뿐‧‧‧ 인사는 존중을 전제로 하며 존중은 인정을 전제로 하며 인정은 판단을 전제로 하며 판단은 인식을 전제로 하며 인식은 자극을 전제로 하는데 그는 자극되지 않는다 세상은 그가 없이도 너무나 잘 돌아가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인사를 받으러 돌아다니는 일일 뿐 인사를 위해 존중받기 위해 존중을 위해 인정받기 위해 인정을 위해 판단되기 위해 판단을 위해 인식되기 위해 인식을 위해 자극 주기 위해 보이기 위해 돌아다닌다 복도를, 계단을, 급식실을, 운동장을, 교무실을, 학생들이, 선생들이 인사를 한다 과연 존중하는지는, 얼마나 인정하는지는,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뭐라 인식하는지는, 좋은 자극인지 나쁜 자극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그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 그는 덜 심심하다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9상세보기 -
시 권창섭 - 변호사
변호사 권창섭 그는 삐졌다 왜 삐졌냐고 묻는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는 더욱더 토라지고··· 할 수 있는 말이란 “삐지다”란 말은 나쁜 말이란 것일 뿐 자신의 언행은 살피지 않고, 기분이 상한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말이란 것일 뿐 “삐지다”는 표준어가 아니므로 “삐치다”가 맞는 표현이란 것일 뿐 아뇨 2014년부터 “삐지다”도 표준어가 되었습니다 라는 검사의 말에 그는 더욱 삐져서 내 말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내 말의 본질은 표준어고 자시고가 아니다 울부짖기 시작했는데 법정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판사와 검사와 그뿐 셋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던 피고와 원고와 방청인들은 모두 삐진 채 퇴장해 법원 앞 해장국집에서 뼈를 발라내고 있는데 사건의 진실을 오도하지 말라 그는 말하고 그 맥락에선 호도가 더 적절하다 검사는 말하고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판사는 말하고 혼자 있고 싶으니 다 나가 달란 말에 검사도 자리를 뜨면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몇 번이고 자신의 언행을 곱씹는다 해장국집에는 살을 다 발라내지 못한 뼈들이 쌓이고 그는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한다 그러면 그는 삐치지 않는다
작성일 2025-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6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