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시·시조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시·시조 윤인숙 - 「복선」외 6편
복선 윤인숙 참 이상하지 빨간 가운을 걸치면 몸에서 죽은 쥐 냄새가 나 유리 머리 폭탄 웃음 마음 바다 어느 쪽이 더 좋아 수족관에 손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손도 키우시나요 그럼 물도 매일 갈아 줘야겠어요 손톱에 물때가 낄 테니까요 깨진 유리 구겨진 웃음 진심으로 고마웠다니, 이런 환멸은 처음이야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다리를 오므린다 온도가 중요해 시시때때로 변하는 손바닥 얼룩같이 두 눈이 없어도 잘 느낄 수 있는 늪의 악어 알처럼 수국을 움켜쥘 때의 기분 모든 첫 중에 첫, 한 입 복숭아 수국을 손바닥으로 움켜쥘 때 무른 복숭아의 즙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거기를 만질 때 조금 젖을 때의 침이 꿀꺽 넘어가는 물고기가 찌를 물고 달아나는 산꼭대기 고사리 밭 층층나무의 향기 이끼 아래 바위 복숭아 살을 손으로 뭉개 봤다면 밀가루 반죽을 휘휘 저어 봤다면 끝물이라는 말 그 여름이 뜨거웠다는, 뼈의 화목 나무가 이름을 얻는다 적막이 가만히 가라앉고 있다 흰 항아리 한 줌 다섯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뼈의 화목 허공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밖은 따뜻하고 속은 부서지는 중 골목을 들어서며 느리고 크게 부르던 노래도 낡아, 노래뿐이다 기억은 가뭇없고 폭풍이 쓸고 간 듯 먼 길이 생겨나고 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다 풀이 풀의 어깨에 기대 흐느낀다 목덜미에 내려앉은 나비의 날갯짓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나무의 이름이 살갗 아래 새겨진다 얕은 밤 고개를 젖혔다가 퉤, 하고 누런 가래를 뱉을 때, 가래가, 누런 가래가 땅바닥에 ‘척’하고 달라붙은 거 같죠. 척하고 뭉개지는 거죠. 산산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요 발끝으로 쓰윽 뭉개지 말아요. 진득한 실이 달라붙을지도 몰라요 영원이 알을 슬어 놓을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도 꽃은 피니까요 어떤 순간도 영원이 될 수 있으니까요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든다는 걸 일깨워 주진 말아요 왜 그런지, 선명한 것은 가여워요 얕은 밤에 꿈은 무르익고 계절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슬금슬금 와버려요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야 할까요 전 언제나 지는 쪽이 더 좋기는 해요 숨 비 오고 라일락이 막 피려고 해요 꽃향기 비눗방울처럼 터져요 다정한 소문 같아요 향기는 몸이 없고 소문은 멀리 가고 비 오는 날, 오른손을 높이높이 볼륨을 올리고 몸을 흔들어요 온몸에 풍선 달고 가라앉는 배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요 아아 목 놓아 노래 불러요 꿈틀꿈틀 드디어 다른 몸이 되려나 봐요 괴로움은 역사가 짧아 우리 엄마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춤으로 노래로 하늘로 하늘로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05상세보기 -
시·시조 박소언 - 「모자의 줄」외 6편
모자의 줄 박소언 그리운 적막이 투명하게 걸려있다 마르지 못하는 목매단 모자 하나가 바지랑대를 하늘 높이 세우면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두 줄이 생긴다 젖은 옷가지들과 모자가 걸린 문이었으므로 하늘이 내린 경계에서 하루의 동거가 바짝 말라간다 맨살을 비비적거리는 살갑던 허공을 헤아려본다 두들기던 얼룩이 서성대다, 발버둥 치다, 뜨거운 태양에 몸을 맡긴다. 자리매김한 여분도 없이 넘나들다, 휘날리다, 사지가 갈리면 문을 닫고 눈을 감고 싶다 두 개의 집게에 물려 벼랑에 설 때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맥없이 자맥질하는 무지개를 동반한 비바람의 날들이 가까스로 씻겨나간다 바람 너머 저 홑청 속으로 얼비치는 아홉 살 여자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등에 밥물을 잡는다 뒷산에 해가 걸리면,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매운 눈을 비비며, 육자배기 노랫가락에 아들 타령 늘어진 아버지가 ”아~ 신라의 밤이여” 털레털레 삽짝 문을 열고 갈지자로 휘청거린다 “아버지 내가 커서 아들 낳아드릴게요” 버스럭버스럭 벗겨내던 슬픈 말꼬리가 아들 없는 빈소를 기억하며 하얗게 운다 구멍 뚫린 양말이 늙지도 못한 채 유품처럼 마당가에 서 있는 빈 바지랑대 줄에 걸린 검정 두루마기가, 술 취한 혼잣말이 낮 그림자에 나풀거리며 자꾸만 손짓한다 흙 마당에 고꾸라진 짝 잃은 속디디미처럼 종종걸음하며 방향을 잃고 몸부림쳐대는 꼴이라니 옷가지 거두어간 자리에 방울방울 물음표만 걸리는 속알속알 느낌표만 걸리는 저 섬망 같은 세월을 하염없이 일으켜 세운다 허공 의자 한 사내가 높다란 허공 의자에 앉아 바람을 타고 있다. 창문에 매달린 꿈을 꾸며 리듬을 갈之자로 가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순간이다. 밧줄에 매달려 좌우로 흔들리는 난간에서 무거운 몸통을 거미처럼 붙여 놓고 사내는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빌딩 외벽에서 사내가 환상을 찾아 떠난다. 반짝반짝 별자리에 머물렀던 적 있었던가. 절벽 같은 유리창에 매달려 흔들흔들 안락의자를 기웃거렸을 뿐이다. 울렁울렁 목을 잡아당기던 밧줄에 맞춰 기어올랐을 벽과 빌딩 사이, 이곳저곳 희망에 꿰차고 앉아 날개를 달기도 했다. 높다란 저녁별 마주 보며 떨어지는 어둠에 하루치의 밧줄을 말아 잡아당겼다. 바람의 끝에서 홀로 앉아 있던 사내의 앉음새가 스르륵 풀어졌다. 핑 도는 어지럼증이 발아래로 튀어 오르자 사내는 그제야 허공 의자에서 내려오는 그때 유리창 아늑한 방안에서 아장아장 기어 나오는 아기가 두 손을 꽉 쥐고 까르르 웃는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 포즈로 나는 그네 타기 놀이에 빠져든다. 은지화 애오라지. 손바닥만 한 딱지에 물고기와 아이들*이 놀고 있다 은물결 팔딱이다 헤엄치다 긴한 말들이 아로새겨진 활자 같다 꼬리꼬리한 비늘이 까르르 뒹굴면 깊은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33상세보기 -
시·시조 임지은 - 「직전의 양」외 6편
직전의 양 임지은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만 좀 불러냈으면 좋겠어 사람들은 양털로 옷도 이불도 해 입으면서 잠까지 덮어버릴 셈인가 봐 가을이 오면 확연하게 줄어든 몸무게에 양이 얼마나 어리둥절해하는지 모르면서 내가 아는 제일 불면증이 심한 사람은 양을 구십구만 구천 마리까지 셌지만 잠이 오지 않았대 세기를 그만두자 그제야 잠에 들었다지 좁은 방에 아침까지 불러 모은 양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섰다지 이런 사정을 아는 동물 애호가는 양 대신 말, 소, 사자들을 불러 모았대 함께 있기에는 긴장감이 넘치는 사이라서 밤새 뜬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지 이런 얘길 들으면 내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해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컵이나 상자를 부르는 건 어때? 쌓아 올리기도 쉽고 무너지기도 쉬운 게 잠이잖아 쏟아진 잠 밑에 깔려 상자에 구멍을 내고 그 안을 들여다봐 보면 하얗고 부들부들한 털이 그게 설마··· 양이 아니라면 대체 뭐겠어 한낮의 잎맥처럼 활짝 펴지는 잠, 수증기 가득한 욕실의 콘센트처럼 짜릿한 잠, 일주일째 닦지 않은 안경처럼 흐릿한 잠, 프라이팬 위에 터진 노른자처럼 중심이 없는 잠, 그런 잠을 자기 위해 사람들은 계속 양을 부르고 좀비 소원 깨고 나니 좀 이상했습니다 욕구라고 부를만한 게 없어졌습니다 더는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는 정말 지각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화가 난 걸까요? 하지만 저에겐 기분이라고 할 게 없어졌는걸요? 그래도 습관이라고 할 게 남아 있어 학교에 갔습니다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비어있는 의자들 ㅂ ㅂ ㅂ ㅂ ㅂ 선생님이 소원을 적어 실내 나무에 걸라고 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소원이라 할 수 있나요? 연필 끝을 씹는 동안 준호가 시아를 깨물고 시아가 영재를 깨물고 나는 깨끗한 종이에 소원을 적고 있었습니다 진우를 더 이상 못 만나게 해달라고요 진우는 사인펜도 잘 빌려주고 내 얘기에 많이 웃어줍니다 진우를 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원은 벌써 어긋나버렸나 봅니다 진우가 내 손을 잡고 달리고 있습니다 못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진우는 하필 나를 만나서 숨을 몰아쉬면 진우는 깨물기 좋은 목덜미를 가졌고 아주 이상한 맛이 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어떤 소원은 정말 이뤄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새로 생긴 점 코 위에 점은 미인 점이라 부르고 손가락 위에 점은 재주가 많다는 뜻이라죠? 입술에 점이 생기면서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친구가 손에 샤프 점이 생겼다고 했을 땐 반투명한 점이 참 신기했는데 나도 없던 점이 생기길 바란 적 있습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진짜 해내는 점
작성일 2024-11-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651상세보기 -
시·시조 신춘희 - 「꽃점은 끈끈이주걱으로」외 6편
꽃점은 끈끈이주걱으로 신춘희 나는 엄마의 꽃점대로 꼬리를 잡고 태어난 딸, 끈끈이주걱 같은 뒤를 달고 유년을 보냈지 창문이 달빛을 커튼으로 오므리면 보이지 않는 별들에게도 하나둘 이름을 지어 주었어 주술처럼 내 안에서 휘돌다가 꽃잎으로 흩어진 나날들, 끝내 나는 혼자 남겨졌지 그때부터 슬픔이 눈동자에 들러붙었던 거야 엄마가 남겨 준 건 지독히 외로운 점액뿐 그 꼬리를 어쩌지 못하고 맹목 같은 꼬리 나는 내 것보다 너그러운 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았어 사춘기를 소화시켜 고백을 받아들일 줄 아는 나이가 되었지 내게 달콤하게 달라붙은 사람이 애인이 되었어 하지만 애인은 여러해살이 비밀에 서식하는 사람이었지 여자와 여자가 겹쳐도 가리지 않더니 바람에 이리저리 튀는 방아깨비처럼 되었어 소문은 돌고 돌아 쉽게 주울 수 있었지 기회 같은 꼬리 꽃이 피고 질 때쯤 새벽에 서둘러 되돌아온 애인은 화려한 꽁지깃이 없이 초라했어 나는 한 번 더 나의 점성을 믿어 보기로 했지 애인은 자신의 꼬리를 잘랐다고 맹세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어 애인에게 새 꼬리가 생겨났지 뭐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삭둑삭둑 자르기 시작했지 얼마 가지 않아 그의 꼬리는 둔갑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 복수란 하는 게 아니라 잡는 것이지 비수 같은 꼬리 가끔 나는 나를 거쳐 간 꼬리를 생각하지 잡은 애인을 도망가지 못하게 조인 다음 단물 빠질 때까지만 두기로 했어 때론 꼬리가 채찍이 되기도 하지 내 꼬리가 휘둘러지면 애인의 질투가 묻어왔어 꽃이 화사한 것은 계절의 꼬리에 있을 때지 끝물처럼 사랑에도 점도가 있어 냉정하게 붙었다 떼는 말도 해 줘야 하는 법, 잠시의 침묵 이때만큼은 배후의 꼬리를 숨길 수 있어 대물림 같은 꼬리 냉정하게 점을 찍으며 선을 긋고 나만의 꼬리로 포획에 성공한 사람과 함께했지 나는 이제 꼬리를 다 썼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물고 있었어 돌아다보니 탯줄, 그 질긴 꽃점이 계속되는 거였지 신로(神路) 신들이 이끄는 길이 지상에도 있다 종묘 담장 안, 아무나 밟지 못하는 혼(魂)과 백(魄)으로 나누어진 통로 중앙에 높이가 다른 신로 종묘도 5월에 딱 한 번 길이 열린다 임금의 길보다 높게 깔린 박석(薄石) 오른쪽은 왕의 길 왼쪽은 세자의 길 양쪽에서 호위하고 있다 저 돌을 따라가면 맞배지붕 아래 신실에 모셔 놓은 신주들이 있다 황색 봉등을 밝히고 제실에 초를 피워 제례를 하면 세 번 나눠 피운 향이 신을 부른다 화장장 굴뚝에서 쏟아진 연기를 신로라고 생각한 적 있다 살짝 나부껴 공기가 호위하는 길 상주들이 올려다만 볼 뿐, 몸을 태워 만든 길은 신만이 걸어와 영혼을 데려갈 수 있는 건지 폐백과 함께 축문처럼 타오르는 불길과 그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한 사람과 그를 데리러 오는 자옥한 신들의 길이 저 중앙에 있다 통곡이 고인의 길을 터 가고 유족들 버스에 오르면 신도 뒤를 밟아
작성일 2024-11-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79상세보기 -
시·시조 봉주연 - 「장소력(場所歷)」외 6편
장소력(場所歷) 봉주연 이곳도 곧 떠나야 합니다.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 다리를,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 다리를 살짝 들어 보세요. 설원은 기울어져 있다. 아버지의 다리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 여러 번 언덕을 오르고 내려왔다. 눈을 감고서도 우리가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작은 다리에 번갈아 힘을 주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단단함 속에 있다. 내가 그랬다는 걸 기억하세요? 우리가 치우칠 때마다 번갈아 힘을 줬어요. 놀이터를 떠나는 아이들은 집으로 가는 길을 따로 외우지 않는다. 손가락의 양식을 알려 줄 순 있는데. 엉덩이를 살짝 들어 보세요.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 아래로 쓰레받기처럼 생긴 것을 집어넣으면 된다. 동작이 끊겼다 이어졌다 끊겼다···. 아버지, 다리에 힘을 줘 보세요. 처음 해 보는 일은 순서를 기억해야 해요. 힘을 주세요. 힘을 줬던 감각을 기억하세요? 뒤를 돌아선다. 놀이터에서 또래 아이들은 망설임이 없다. 내 뒤로 올라오는 아이가 밧줄을 당긴다. 허벅다리가 쓸린다. 처음엔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나의 집은 여기에 있고 그 위로 반드시 거기가 따라옵니다. 이제는 집이 너무 무거워요. 봄이 되면 이사를 할 거예요. 이 얘기를 처음 꺼내. 새로운 집의 첫 번째 손님이 되는 것과 떠날 집의 마지막 손님이 되는 일 중에서 하나를 골라 보세요. 내일 현관문을 열었을 때도 오늘과 같이 이 집을 사랑하기 위하여. 물고기는 알아서 한다 마냥 좋을 줄 알았어요. 늦은 아침 거실 바닥에 물고기가 떨어져 있습니다. 어항 밖 반짝이는 실내 더 깨끗한 물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책상 아래엔 발뒤꿈치와 소란, 저녁의 거스러미, 산 벌레들과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며 잠드는 행복이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사이에 자라납니다. 나보다 먼저 내 집의 문을 열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외출하고 돌아와 아무 걱정 없이 불을 켤 수 있다니, 너는 복이 많은 사람이군요. 비 오는 날엔 의젓하지 않은 사람이 좋습니다. 분수대로 만든 터널이 보이면 그 가운데로 꼭 지나가 보는 사람. 물그림자도 밟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너를 구경하고. 부럽다, 참 부럽다. 돌아갈 걱정을 하지 않고 맘껏 젖는 휴일에. 옷을 다 버린다고 나무란 적이 없었어요. 물이 떨어지는 차림이어도 개의치 않고 문을 열어 줄 거예요. 깨끗하게 씻은 너를 무릎에 눕혀 귀를 파 주고 여기서 음정이 솟아난다, 눈썹 주변으로 튀어나온 뼈를 지그시 눌러 주면서 너는 귀가 참 작군요, 귀가 작은 사람은 복이 없다던데 먼저 나갈게, 먹고 가세요. 냉장고엔 전날 설탕에 재어 놓은 과일도 있고 내 방을 들여다보는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네가 보는 이 안은 투명하고 바깥세상은 굴곡되어 있습니다. 너의 집을 궁금
작성일 2024-11-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98상세보기 -
시·시조 김정배 - 「금서」외 6편
금서 김정배 글을 읽고 나면 눈이 멀었다지 평생 그 글만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지 손끝의 힘으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제국은 무너지고 흰 종이는 숨을 거두었다지 모든 문장은 늘 절박하지 어떤 구절도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지 가령 내 어머니도 읽지 말아야 할 구절이었다지 밑줄이 너무 많아 가슴에 귀를 대고 있으면 어떤 호흡도 두근거릴 필요가 없었다지 불길에 휩싸이면 불보다 먼저 타오르는 얼굴 입가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지 눈멀고 혀가 굳은 표정들이 찾아와 얼굴을 바닥에 쏟아낼 때마다 금서로 쌓아둔 책들은 서술어가 지워진 나뭇잎을 떨어트렸다지 그걸 줍는 아이들, 자라서도 입속에 유배를 구겨 넣고 살았다지 스스로 금서가 된 줄도 모르고 이미 밑줄 친 문장에 또 밑줄을 그었다지 마지막 페이지의 독이 사라지고 손끝의 글자가 희미해질 때까지 사람들은 읽지 않아도 되는 얼굴을 해독하며 문장을 이어갔다지 모탕 아이들의 웃음이 튀어 오른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 놀이터 한 켠 낡은 그물망 위로 5분에 300원 널빤지에 그린 노인의 빼뚤빼뚤한 글씨가 파도 소리에 지워질 듯 넘실거린다 아이들은 탄력 있는 수평선을 발판 삼아 대서양 어딘가로 향하는 참다랑어 떼처럼 한꺼번에 공중으로 솟구친다 허공의 허공 위로 웃음이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바닥의 머리카락이 천장 끝에 가닿으면 햇살 출렁이는 공중의 난류 속에서 만선을 꿈꾸는 거미들, 잔챙이 바람이 빠져나가기 좋은 간격으로 바다에 그물을 치고 있다 바닥 아닌 바닥 밑으로 아직 상처를 배우지 못한 풀들이 자라고 그 풀들이 가끔 풍랑을 풀어놓으면 바닷가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인도에까지 표류하기 일쑤였다 가장 높은 허방을 짚고 서서 얼굴 검은 아버지를 만났다가 내려온 하루 아이들의 얼굴엔 침묵이 부표처럼 떠다녔다 10분에는 500원, 생선 궤짝 마냥 지루해진 하루 속에서 몇 번의 계절을 뒤집으며 착지하는 나뭇잎들 문득 밑도 끝도 없는 바닥에서 홀로 튀어 오른 트램펄린은 지루한 바닷가 풍경을 잠깐 감추기도 하였다 그제서야 노인은 흰 머리카락을 수평선 너머로 쓸어 넘기며 찢어진 하루를 오래 손질했다 참다랑어 떼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모탕: 나무 팰 때 밑에 받치는 나무토막. 빗속을 헤매는 휘파람처럼 당신이 뒤에서 휘파람을 불 때 나는 우산 대신 햇살이 필요했던 날이었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태양은 녹아내리고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개미의 연회가 되었어요 하지만 일하지 않아도 창밖은 고요하니 증명해 볼까요? 붉은 골목에 쉼표를 던지며 바람 속에서 태어난 비닐봉지의 아이 더 말해볼까요? 그저 한 장의 전단지는 목숨을 구하지 못해요 울음은 때로 강력한 무기가 되니까요 가뭄에 죽은 맨드라미를 봐
작성일 2024-11-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82상세보기 -
시·시조 고광식 - 「가스라이터와 함께하는 시간 ―태양」외 6편
가스라이터와 함께하는 시간 ―태양 고광식 당신은 나의 가슴을 열고 태양을 심었다 심장 대신 태양은 뜨거운 분노로 이글거린다 큐브처럼 여섯 가지 색깔의 표정을 찾아 당신이 지목한 사람들을 폭행했다 관상동맥은 뜨거운 열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아버지를 폭행하는 날이면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심장이 약속보다 빨리 뛰어 나는 흥분한다 깨끗해지기 위해 단단한 빗장을 풀었다 태양을 안고 달리다 보면 늘 동쪽 서쪽 너머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당신의 입술은 책 어느 페이지이든 숨어 있다 동생이 강물에 뛰어들어 나를 잡아당겼다 축축한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언제나 옳다 태양이 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당신이 준 태양을 심장 대신 가슴에 품고 다닌다 열리는 입술을 보는 나의 귀가 커진다 바다의 소멸각 나는 바다와 육지 사이에 고래를 그려 넣었다 검은 눈동자 속에서 해변이 소멸하고 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셀프 마사지기로 문질러댔다 아침과 저녁을 오가며 파도가 출렁인다 소멸하는 파도가 안타까웠다 각이 사라진 고래는 곧 척추동물의 소멸을 예고한다 고래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바다의 각이 다 닳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케 했다 고래 등에 각이 산다 멀리 있는 겨울 바다의 표정이 녹아든다 고래수염은 각자 각을 만든다 바다 각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나는 몇 번 태양의 각을 떴나 일출과 일몰 때의 시간을 모두 놓친 것 같다 크릴새우와 수염 사이의 각은 살아 있다 고래의 시간은 열대 대양에 각을 뜨면서 만들어진다 파도의 높이와 상관없이 바닷속은 각을 뜨기 좋은 압력으로 눌리는데 차단된 소통은 외로움을 부른다 소음은 파도치는 속도로 플랑크톤처럼 쌓인다 좌우 비대칭으로 기울어진 자세로는 바다의 각을 뜰 수 없다 파도는 공작새의 꼬리만큼 화려하다 고래는 해안가에 일렬로 떼 지어 마지막 각을 만든다 각은 고래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하얗게 흩어진다 난독증 ―결별 ㅍ, ㅏ, ㄷ, ㅗ를 놓고 마주 앉았다 카페의 창문에 매달려 우리를 붙잡고 있는 바다 꽃병과 꽃잎이 분리되지 않는다 커피잔과 네 입술을 구별할 수 없는 시간이 의자 밑으로 흐른다 구름이 바닥에 깔린다 표정 잃은 너의 발과 내 발이 동시에 젖는다 이미 구별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버린 우리의 발 ㄱ, ㅡ, ㅁ, ㅏ, ㄴ, ㅁ, ㅏ, ㄴ, ㄴ, ㅏ 각각의 소리에 대응할 수가 없다 네 목소리가 낮게 탁자와 탁자를 건너뛰고 있다 긴 꽃병이 환경에 적응하려는 듯 바닥의 물을 위로 끌어올리고 있는데 카페의 의자는 유행가로 사랑을 만든다 너는 항상 같은 의자에 앉아 지연 없이 이해되는 말을 익혔다 노래는 감정을 파도에 섞으며 가벼운 허기로 삐걱거렸다 젖은 발로 구름을 밟는 너, ㅇ, ㅏ, ㄴ, ㅕ, ㅇ 시각적인 기호를 나는 분리할 수 없다 고양이 무리가 되고 싶
작성일 2024-11-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14상세보기 -
시·시조 홍성남 - 「낙타는」외 6편
낙타는 홍성남 이 도시를 걸어야지 죄라도 지어야지 걷고 걸어도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지나온 길은 보이지 않고 자랑스러워할 어떤 이름이 없어도 낙타는 낙타에 있어서 무럭무럭 자라나라고 혼자 말해 보는 것 건물 사이로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사다리를 오르듯이 번지점프를 하듯이 메마른 콘크리트 속을 걷는다 같은 걸음으로 도시는 폭염과 한파를 반복하고 그 속에서 꿈을 꾸며 꿈꾸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층 빌딩과 도시가 키우는 낯선 그림자를 밟으며 그림자에 밟히며 이젠 없을 숲을 향해 걷는 일만이 할 일이라는 듯이 건물 사이사이 한 걸음걸음 도시를 걷는 중이다 도시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너도 죄가 많았구나 울음소리가 우리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 울지 못하는 자의 이름을 이젠 잊어야 한다 콘크리트 숲을 걷는다 모래사막을 걷듯이 발자국이 없는 끝없는 사막도시를 걷는다 사과의 얼굴 사과는 언제나 떨어지기 직전의 얼굴이다 빨갛고 파랗고 혹은 그 사이의 얼굴로 매달린 안간힘처럼 나는 척하기 명수이다 안 아픈 척하기 배부른 척하기 욕심 없는 척하기 알 수 없는 미소로 들여다볼 수 없는 표정으로 다양한 척하기 얼굴이다 부사의 얼굴을 조사로 바꾸며 분장하기도 한다 사과를 쪼개기 시작한다 속을 가르고 씨방을 털어 내고 씨는 마지막 보루로 끝까지 숨길 생각이다 태풍에 떨어진 낙과처럼 렌즈에 찍힌 흠이 난 사과처럼 둥그런 척하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거짓말을 잘하는 이웃집 언니처럼 붉은 겉에 하얀 속 파란 겉에 붉은 속 나는 겉과 속이 너무 가까워서 멀고 먼 사이 사과를 깎으며 안 아픈 척하는 얼굴을 꺼내고 욕심 없는 척하는 얼굴을 꺼내어 멀리 던진다 쪼개지고 흩어져도 자꾸 되풀이되는 얼굴들 나는 다시 떨어지기 직전의 얼굴 겨우 매달려서 둥글어지는 중이다 각설탕 나는 모서리에서 자랐다 이불을 반듯하게 개고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정리하며 모서리를 키웠다 모서리에 모서리를 맞대면 모서리가 아닌 것들이 보였다 낯설고 부끄러웠다 백지의 여백처럼 종일 모서리를 만들면서 놀았다 나는 줄 게 없으니 무엇이든 반듯하게 펴 놓았다 겹쳐지는 모서리가 각설탕처럼 쌓여 가고 각설탕이 든 유리병에 햇빛이 통과하기를 기다리는 날들이었다 저절로 침이 말랐다 각설탕은 유리병 속에서 서로의 어깨를 받쳐 주고 있었다 아껴 먹던 각설탕을 한 움큼 집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서리가 만져졌다 하얗고 쓸쓸하였다 세상의 모든 모서리를 가진 골목 같았다 그런 골목이 있다면 나는 끝까지 모서리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서지겠지 녹아 가겠지 사라지고 없겠지 내가 사랑했던 것들
작성일 2024-11-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32상세보기 -
시·시조 김조민 - 「심오해 보이는 헛소리의 인식과 수용에 대해」외 6편
심오해 보이는 헛소리의 인식과 수용에 대해* 김조민 우리는 지금 여러 바람에 편승하는 과민성모방증후군의 시대 단지 유행하는 고양이일 수도 있겠지만 상자 안에 스스로 격리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어림짐작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까다로운 조건은 없습니다 부정확한 기억을 일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상태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겠죠 그것보다 모호한 것은 없다는 확신 같은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인상적으로 읊조릴 수만 있다면 그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으로도 직관적인 경험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저 마침내 선택된 양식일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다양한 변수는 고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양식의 맨 위, 온전히 강조된 차원에서의 목적이 효과적인 오류나 출중한 편향이 아니기를 주장할 뿐이죠 그러나 우리의 고심은 책임감 있게 분산되므로 종종 서로를 무분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오케이, 그것으로 되었어 심오한 진실은 상자를 열었을 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2016년 이그노벨상 평화상 수상자 고든 페니쿡의 논문 제목이지만 이 시는 고든 페니쿡의 논문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없었던 금기어에 대한 최초의 증언 밀폐용기 안에 단어를 넣어 두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후회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몇몇 단어들은 슬리퍼나 가방이나 종이컵 따위로 대체되었죠 꽃잎들이 불필요하게 나뒹구는 저녁 우리는 어리둥절한 이별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순서대로 넘실거리는 책상과 막연한 가장자리 몇몇의 그물이 서로와 서로에서 헤매느라 한쪽만 닳아지고 있는지 몰랐던 거였어요 어느 날 흔한 얼룩조차 생소해지는 얼굴이 되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이불 속에서 한참을 울겠지만 어떤 목소리에 뒤돌아봐야 할지 영영 알지 못하는 순간이 되고 말겠죠 밀폐용기가 공공연히 부풀어 올랐지만 그 이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닫힌 입을 부여받은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가 미리 준비했던 포기는 소용없었습니다 목록을 뒤적이는 밤 문을 열면 등 뒤의 문이 다시 앞에 놓이는 꿈을 연속해서 꾸었다 어떤 날은 등 뒤의 문이 내 앞에 놓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사라지는 나의 등을 보기도 했다 들어가자마자 다시 들어가야 하는 문을 열고 나가는 나의 등은 미세하게 쪼그라들었다가 평평했고 한 방향으로 기울어졌다가도 접혔다 어쩐지 누군가의 입술 같기도 했고 그렇게 쏟아졌던 수많은 악담 같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은 잠들기도 전에 벌써부터 내 등을 보고 있는 듯했다 눈을 감지 않아도 아주 잠깐 가벼워졌다가 문과 문 사이에 나는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잠깐은 결론을 위한 아주 짧은 한숨이었지만 무한의 조건이어서 내 등의 표정을 읽을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하는 순간이면
작성일 2024-11-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48상세보기 -
시·시조 김필아 - 「어쩌면 이런 날이」외 6편
어쩌면 이런 날이 김필아 어슬한 날씨를 입술에 얹는 일은 곧 장마가 오겠다는 일기예보를 빌라 옥상에 늘어놓고 방울토마토 몇 개를 따 손톱으로 붉은빛 굴려 보는 일 튀어 오르는 자갈처럼 초록 들판을 달려가는 일곱 살 아이의 마음처럼 바람이 전나무 숲을 헝클고 건너가는 모양새를 지켜보는 일과 곧 장마가 머물겠다는 소식에 모르는 꽃의 이름을 입술에 얹어 보는 일 말간 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백자를 깨뜨리고 밤 아래 피는 꽃을 말한 것은 아닌데 밤이 굴러가는 담 아래 흰 꽃봉오리 뱀 대가리로 기어오르는 일이 되었다 유리 항아리에 매실을 푸르게 붓는 일은 뱀 알을 품는 일 같아 신을 영접하는 그 숨결의 언저리 맴돌 수밖에 없고 어슬한 날씨 모실 생각을 미리 해 두는 일과 그럼에도 벤치에 햇볕이 앉은 자국이 남았다고 문자를 보낸다 어쩌면 저녁이 먼저 어슬해 오는 이런 날이 좋을지도 모르죠 한때 아침 볕이 잠잠하여 책을 버린다 눈멀어 가는 사람이 되어 걷는다. 청설모가 잣 방울을 끌고 가려다 나무 위에서 여러 번 놓친다. 떨어지는 소리의 방향으로 청설모가 따라가 줍는다. 청설모가 손에 쥐는 것은 뚝의 소리 눈이 내리는 사람이 되어 잣나무 숲을 맨발로 걷는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찌릿한 전깃불. 천천히 느끼도록 몸을 여기에 둔다. 나는 차가운 밤처럼 선명하다. 무덤의 책자처럼 차갑다. 바닥은 찌른다. 나는 열리는 꽃 나는 쌓인다 꽃의 적설량 당신은 폭닥한 이불을 덮은 것 같다 한다 모과의 배꼽 나비를 입속에 넣었다 파르르 떨리는 심장을 갖게 되었다 모과 향이 났다 * 모과는 여름에 푸르기로 했다 모과 꽃에 밟히는 빗소리 * 나는 물고기와 모과 꽃 사이에 서 있다 비가 길어진다 모과 꽃 속에 점자를 박은 물고기 헤엄친다 우툴두툴하다 물고기는 표음 문자를 달고 나는 물고기의 소리를 엿듣기 위해 나무가 되기로 했다 * 푸른 낯빛을 잡고 살이 깎인다 몸통이 작아질수록 안간힘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인다 모과 씨가 박혀서 몸 깊숙한 곳에 씨를 묻은 물고기가 유영한다 꼭꼭 몸을 여민 씹어 먹을 수도 없는 배꼽을 내밀고 물고기는 나를 본다 있는 듯 없는 듯 꽃을 피우는 배꼽을 보고 있다 푸르뎅뎅 물방울이 탑처럼 쌓이다 하나가 되는 상추 꽃 나는 상추만 있으면 밥 잘 먹어 남자는 밥 못 짓는 여자에게 청혼한다 여자는 붉은 옥상 고무 통에 상추씨를 뿌린다 까치의 아침 식사가 되는 날이 있다 저녁 식탁에 상추는 지칠 줄 모르고 매일 올라온다 어느 날 꽃대 세운 상추가 빳빳하다 하얀 젖이 꽃대에 흘러내린다 남자는 상추에 손을 대지 않는다 여자는 상추를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 상추 꽃들이 텃밭을 노랗게 덮고 있다 꿈의 카타콤 하짓날 잠자리에 들 때 베개
작성일 2024-11-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59상세보기 -
시·시조 이정란 - 「당신 귀는 언제부터 두 개였지」외 6편
당신 귀는 언제부터 두 개였지 이정란 빳빳하게 말라버린 침묵에 따뜻한 우유를 붓고 잘 저어줍니다 만져지지도 읽히지도 않는 그것이 씹어 삼킬 수 있는 물성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알약 하나로 끼니를 대신하는 시대가 온들 이런 매직은 사라지지 않겠죠 발효가 덜 된 그림자의 통식빵 식기 전에 얼른 찢어 삼킵니다 세상 버리고 동굴로 들어간 사람의 심장이 이런 맛일까요 어젠 통 부풀지 않아 효모를 과하게 넣어도 보고 열선도 두드려보고 재료의 배합보다는 부글거리는 화기를 타이머로 조절시키는 방식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게 가루도 아니고 액체도 아니게 질척임은 더욱 아니게 비율이 잘 안 맞으면, 당신 귀는 언제부터 두 개였지, 엉뚱한 간투사가 튀어나와요 환장하게 뜨거워도 끓어오르지 않고 겉바속촉 완성하기 거울의 소용돌이 오랫동안 걸어두었던 얼굴을 떼어 뒷면에 한 줌 어둠을 펴 발라 만든 거울이 있다 어디서 온 어둠이냐 물으며 가을이 우두커니 얼굴 비춰보는데 거울에 비해 얼굴이 크다 입구에 노란 이파리 한 장 상징처럼 떨어져 있는 숲을 들어설 때 어둠에게 내주고 남은 것이 바람의 음계려니 하는 생각은 비춰볼 거울이 없어 돌이나 한번 걷어찬다 얼굴을 거울에 비춰야 하나 거울을 얼굴에 비춰야 하나 그날 밤 돌에 맞아 깨져버린 거울에 얼굴이 딱 맞았다 반가워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도 산산조각 나 있었다 눈떠 보니 거울도 얼굴도 없다 틀 없는 거울 틀 없는 얼굴 깨져서야 서로 일치하는 꿈이 아니었는데 그 돌멩이 어디로 갔을까 어느 소용돌이에 섞여 들었을까 시간 오래된 손수건 같은 햇빛 한 장 던져놓고 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등을 당겨 그를 왼쪽으로 옮긴 후엔 곁에 남은 사람은 나 하나뿐 조금씩 조금씩 더 왼쪽으로 내 숨은 그 속도에 맞추어야 한다는 듯 길게 내뿜지도 깊게 들이마시지도 못하고 있다 마침내 탁자 다리를 타고 바닥으로 미끄러졌을 때 마르지 않은 시간 한 방울을 날름 핥은 고양이 그 자리에 석상처럼 앉는다 뒤척이던 고양이는 한 장 달빛에 덮였다 달빛은 시간의 알 누군가 내 곁으로 와 깨뜨렸다 한 장의 시간에 덮이기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너무 길고 검다 태양을 사색하기 위해 두 사람은 손금을 마주 대고 몸을 웅크렸다 태양이 다시 올 때까지 혹은 고양이에서 달빛이 놓여날 때까지 탁자 위 택배 상자에선 곯은 시간이 흘러나오고 있다 바람을 훔친 바람의 다이어리 햇살을 중재하는 검고 긴 그림자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곤궁한 외길을 만들었다 곰팡이와 정든 쿰쿰한 살림살이 바람의 외눈동자 같은 현기증엔 독이 있었지 팔고 남은 하치들만 먹는 농사꾼처럼 차마 아끼던 순수와 진실은 말라비틀어졌고 이유 모르게 찢긴
작성일 2024-11-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39상세보기 -
시·시조 이경교 - 「한밤의 까마귀」외 6편
한밤의 까마귀 이경교 한밤중에 까마귀를 본다, 방금 나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었다 까마귀는 어둠 속에 처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까마귀는 제 몸의 검은 빛을 어둠 속에 보태고 있다 어둠을 입은 까마귀 울음소리가 따스하게 밤공기를 뒤흔든 뒤 밤은 더 짙은 검은 빛 속으로 가라앉는다,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까마귀를 나는 더듬는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컴컴한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는다 한순간, 한 움큼의 어둠이 마치 까마귀만 한 분량으로 더욱 짙어지다가 풀어지는 걸 본다, 어두워 까마귀는 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한 줌의 어둠인 줄 안다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 한밤의 까마귀, 어둠 중의 어둠인 저 까마귀 저 검은빛은 누구의 빈약한 배후인가 잠든 하늘에 걸려있는 구름은 왜 딱딱하게 몸이 굳나, 까마귀 떼가 지나가자 구름은 맥없이 풀어지고 건드릴수록 구름은 더욱 캄캄해진다 오오래 변방을 떠돌던 까마귀들도 덩달아 어두워진다, 울음도 세월 가면 녹이 스는지 목쉰 까마귀들이 울고 있다, 보이지도 않는 허공을 흔들며 검은빛이 단단하게 뭉치고 있다 경전(經典),낙타 소설의 시작은 모래밭이었지 모래밭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이 사건의 암시였지 어떤 사건이 지나갔다는 걸 눈 밝은 독자들은 눈치챘을까 눈망울이 큰 낙타가 피해자였지 지난밤 선량한 낙타를 누군가 응징했지 그건 그가 신이라 해도 온당치 못한 처사였지 더구나 모두들 낙타를 사랑했지 그건 사랑에 대한 도발이었지 어지러운 발자국 속엔 낙타의 것도 섞여 있었지 영문도 모른 채 낙타는 주저하고 발버둥을 쳤으며, 끝내 저항한 걸 알 수 있었지 그 저항이 복선이었지 가혹한 우연이 낙타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 그러나 훨씬 많은 수의 발자국들은 일정한 궤도를 그리고 있었지 계획된 범행을 알리는 확실한 단서였지 누군가는 발자국들이 원형이란 사실을 지적했지 그 원형은 사건의 끝없는 순환을 상징한다고 했지 그것은 지속적인 낙타의 수난을 의미했지 불길한 예언이었지 발자국의 개수가 증식하고 있다는 걸 주목한 이도 있었지 원형증식은 무한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재앙이 온다고 했지 낙타의 수와 범인의 비율이 불균형을 초래하는 것도 문제였지 종말은 한쪽의 전멸과 함께 가까워지고 있었지 낙타가 사라지는 건 순한 눈망울과 긴 속눈썹의 상실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종식을 뜻했지 아무도 소설의 결말을 알 수 없었지 그것은 소설의 소멸에 대한 암시이기도 했지 모두가 사라진 곳엔 텅 빈 모래밭만 남겨질 것이므로, 사람들 역시 모래를 닮아갈 것이므로 낙타는 사라짐으로써 영웅이 되었지 복선의 해명이었지 종말을 예고한 암시의 희생제물로서, 그는 종말에 저항하는 이들의 종교가 되었지 모든 신앙이 그래왔던 것처럼 점액질 사람들은 저마다 깃 안에 고개를 파묻고 흘러가지 물컹거리는 안개 더미 속으로 점액질처럼 스며들지 그냥, 묵묵히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어디쯤에서 다 녹아버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 다만, 흐르고 흘러 저 다리 아래로 강물은 흘러가고 사람들은 지
작성일 2024-11-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77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