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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47

2025년 11월호
2025년 11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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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5.11.01
빨간 만년필

빨간 만년필 차영은 과장이 신제품 매출 통계를 달라길래 구글 스프레드시트 링크를 팀 채팅방에 올렸다. 요약해서 뽑아 와. 과장의 답장이었다. 통계를 A4용지 한 장에 담기는 어려웠다. 어떤 항목을 숨길까요? 재량껏 해. 글자 크기를 9포인트로 줄여도 인쇄 미리보기를 누르면 표는 여전히 용지를 벗어났다. 신제품은 최근 일 년간 출시된 것으로 한정했다. 지난해 전체 합계와 월별, 월평균,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월별 매출액, 그리고 증감률 위주로 표에 모든 정보를 눌러 담았다. 내 재량은 A4용지 다섯 장 분량이었다. 과장은 첫 장만 훑어보고는 종이들을 자신의 책상 위로 툭 던졌다. 과장이 종이를 던졌어요. 인영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답답하네. 너 이명박 때 몇 살이었니? 선배가 답장했다. 초중고 때 대통령이 이명박이에요. 취임부터 퇴임까지 다 봤죠. 난 대학 때도 대통령이 그 사람. 선배는 나보다 일 년 먼저 입사했고 다섯 살 많다. 나이 많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선배가 과장의 자리로 갔다. 링크 한 번 띄워봐 주시겠어요. 이거 깔때기 모양 누르시고. 필터를 깔때기라고 표현하는 선배의 눈높이 교육에 감탄했다. 여기 나오는 항목 중에서 보시고 싶은 거, 체크박스에 체크하시면 표가 바뀌거든요. 나도 그건 할 줄 알아요. 과장이 말했다. 과장님 애플 모니터, 거의 영화관인데요? 뭐든 잘 보이겠어요. 선배가 과장의 모니터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자 과장은 의자를 뒤로 뺐다. 과장은 선배를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했다. 선배는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한 사이에나 침투할 수 있을 법한 좁은 틈을 순식간에 뚫고 들어갔으니까. 선배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과장은 네가 표를 한 장짜리로 만들어서 뽑아 가도 뭘 생략했냐고 일일이 물어볼걸? 엑셀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귀찮은 거지. 과장이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일까. 나는 뭔가를 도모하려 할 때마다 과장과 마주쳤다. 작년 말 대학 선배의 소개로 경영 컨설팅 회사의 면접 제안을 받았다. 이직되면 어떡하냐는 내 말에 대학 선배는 말했다. 되고 나서 걱정해. 청약 사이트에 시세 30억짜리 아파트가 15억에 나왔을 때 친구가 물었다. 돈 없는데 당첨되면 어떡하냐고. 나도 같은 말을 했다. 오만 명이 몰려서 서버가 다운됐어. 되고 나서 걱정해. 회사 근처 카페에서 헤드헌터와 통화를 마친 뒤에야 옆 테이블에 과장이 앉아 있었음을 알아챘다. 몇 시간 뒤 내가 이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곧이어 헤드헌터의 전화가 왔다. 내가 새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돼 이직을 못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컨설팅 회사는 나를 꼭 뽑을 필요는 없었는지 면접도 취소했다. 그 프로젝트는 과장이 맡을 예정이었고, 지원자 모집 공고는 뜨기도 전이었다. 인영 선배와 점심으로 포케를 먹고 옥상정원에 갔다. 스프링클러가 헤드뱅잉을 했다. 물은 찔끔 나왔다. 애쓰는 모습이 가련

소설 2025.11.01
굴은 구르지 않는 돌

굴은 구르지 않는 돌 함윤이 함윤이의 소설 「굴은 구르지 않는 돌」을 위한 사운드트랙 ⓒ 이해인 “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영어 속담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 - 두보의 시 「팔전도」 중 그 동굴에 관한 말 중 열에 여덟은 거짓이다. 내가 사실을 알려 주겠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을 테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걸 얘기하려 한다. 동굴은 2019년 7월 말, 뼈까지 침식되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장차 미술관이 될 부지를 측량하던 일꾼들이 발견한 것이다. 미술관을 ㅂ기업의 새로운 문화적 간판으로 삼고자 한 용 회장은 동굴의 소식을 듣고 긴긴 고민에 잠겼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을 나는 어쨌거나 지지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사들인 광막한 땅에 난 균열의 시작점처럼 보이던 공동(空洞)을 활용키로 마음먹었다. 곧 동굴을 개조한 미술관 ‘별관’을 만든다는 소식이 ㅂ기업 산하 문화재단에 퍼졌다. 당시 문화재단의 직원들이 느낀 암담함이야 추측할 수 있을 뿐, 여기에 대해선 나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별관 설립을 곁들인 공사가 시작된 2020년에는 모두가 알 전염병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이 열을 앓았고, 연달아 기침했으며, 멍한 얼굴로 집안에 갇혀 있었다. 한번 몸에 깃든 병증은 다른 몸들로 옮겨 다녔다. 죄지은 마음이 곳곳에 퍼졌다. 용 회장은 늘그막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시기를 주름잡을 지렛대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여러 겹의 우연에서,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의 교차점에서 오는 것이었다.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외려 지금이야말로 별관의 공사를 진척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어차피 동굴을 다듬는 작업자들은 모두 두터운 마스크를 써야 했다. 산업용 방진 마스크가 코비드 바이러스를 막기에 적절치 않다는 연구 결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한여름의 굴속에서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호흡 곤란을 호소해도 용 회장은 그저 밀어붙였다. 시대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어도 공사장 인부들은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인부들은 매일 땀 흘리고 번갈아 기침하며 동굴을 파고 들어갔다. 굴은 외부의 빛과 습기 속으로 서서히 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4년 후에야 이 흐름에 끼어들었다. 전염병이 지나가고, 지나갔다, 는 표현과 상관없이 외상과 내상을 받은 이들이 남고, 무수한 마스크가 쓰레기 더미가 되어 우리가 모를 곳에 묻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해의 예술지원사업에 모두 떨어졌다. 국가나 서울시, 민간이 운영하는 지원사업의 선정자 목록 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각종 웹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뒤늦게라도 창작자를 모집하거나 후원한다는 재단 또는 기관의 공고를, 아니면 카메라를 다룰 줄만 알아도 곧장 일자리를

소설 2025.11.01
미라의 바다

미라의 바다 유영은 0 참 까맣고 짧다. 정숙은 갓 태어난 미라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 말을 생각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너 꼭···, 하면서 말을 고르던 정숙은 드디어 딱 맞는 말을 찾아냈다. 너 꼭 미라 같구나! 시간이 갈수록 검고 바삭바삭해지는, 살점이 까맣고 얇은 조각이 되어 손을 대면 후두두 떨어져 나가는 미라. 그렇게 미라는 미라가 됐다. 미라라니, 잔인한 이름이라고 언젠가 지희는 말했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였다. 미라가 된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정숙은 그때 미라를 보고 그러니까 너 꼭···, 시체 같구나! 외칠 뻔했으므로. 시체보다는 미라가 되는 게 낫지 않은가? 시체는 완전히 끝난 거지만, 미라는 이어진다. 미라는 평생 검었으나 열여섯 살부터 더 이상 짧지는 않았다. 자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열네 살까지 백사십 센티미터를 넘지 않던 미라는 열다섯 살, 열여섯 살, 두 해 동안 삼십 센티가 넘게 컸다. 하룻밤 새 일 센티가 자랄 때도 있었다. 그 시기 미라는 아침마다 갈색 개털 무덤을 빠져나와 똑바로 서서 양팔과 다리를 쭈욱 뻗고 그 끝의 손과 발을 쳐다봤다. 손과 발은 미라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팔과 다리는 길고 가늘어졌다. 부슬부슬한 갈색 털이 꼭 같은 개 세 마리가 아침마다 가늘어지는 미라의 발목을 핥았다. 미라는 키가 자라고 난 후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갑자기 자란 팔다리의 피부가 얇아지다 못해 모두 벗겨져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내리꽂듯 떨어지는 소나기, 동네 뒷골목의 쓰레기 냄새, 더위, 추위, 바람, 햇살, 살에 닿는 모든 것이 따가워서 마당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 엄마. 정숙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라가 집에 계속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어미 새가 되는 것은 정숙의 오랜 꿈이었다. 정숙은 월, 수, 금요일에는 17층짜리 오피스 건물에서, 화, 목, 토요일에는 4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청소일을 했다. 새벽 여섯 시에 나갔다가 두 시쯤 대낮의 길을 걸어 미라가 개들과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며, 정숙은 자신이 둥지로 돌아가는 어미 새라고 생각했다. 아기 새들이 바글바글 들어 찬 둥지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목젖이 보이게 입을 벌리고 삐악삐악 울며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라를 위해 정숙은 퇴근할 때마다 집 앞 빵집에서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사 갔다. 비슷하게 생긴 조각 중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조각을 고르는 시간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미라는 크림만 떠서 먹었다. 딸기와 빵은 흙 마당에 던져두면 가장 날쌘 개들이 달려와 먹어 치웠다. 잠깐, 그 애들 이름이 뭐였지? 몽글이, 구름이, 별이···. 미라는 매일 부대끼는 개들의 이름을 헷갈렸다. 미라의 개들이 아니라 모두 정숙의 개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숙의 개들은 처음에는 아홉 마리였다가 곧 서른세 마리, 스물여덟 마리, 마흔두 마리, 마흔

소설 2025.11.01
전기로 꿰맨 사람

전기로 꿰맨 사람 천선란 그녀에게서 답장이 온 건 3개월 만이었다. 답장이 늦었습니다. 그녀에게 여러 차례 메일과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희에게 달랑 저 한 문장 쓰인 메일 제목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희는 로그인된 메일이 업무용 메일이 맞는지, 실수로 개인 아이디로 로그인한 것은 아닌지 다시 확인했다. 아주 가끔 희의 핸드폰과 PC가 연동되며 PC의 로그인 정보가 희의 개인 정보로 전부 변경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개인 메일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연락을 간절하게 기다리지 않았기에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로그인은 업무용 아이디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광고성 메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희가 메일을 클릭했다. 고민이 길어져 답장이 늦었습니다. 업무에 지장이 생기진 않았을지요. 개인 메일로 연락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담당자님이 먼저 읽으시고, 판단하시길 바라서요. 괜찮으시면 이 메일로, 담당자님 개인 메일 주소로 답장 주세요. 내용을 보자 당혹스러움이 더 짙어졌다. 메일의 미궁이 더 깊어진 기분이었다. 광고성 메일은 아닌 듯했고, 그렇다면 피싱 메일인가? 이런 식으로 지인인 척 혹은 중요한 메일인 척 개인 메일을 알아내려는 수단일 수도 있겠다. 이 시대의 피싱이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의심해서 나쁜 건 없었다. 이전에 주고받은 메일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면 편했겠지만, 데이터 용량 기준법이 시행된 뒤로 메일을 한 달에 한 번씩 전부 비워야 했다. 이전 내용이 없는 것을 보고 희는 제목의 ‘늦음’이 적어도 한 달 이상 되었다는 걸 그때야 알아차렸다. 정말 급한 일이었다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재차 독촉하는 메일을 희가 보냈을 것이다. 희는 그 메일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원칙대로라면 쓰레기통을 바로 비워야 했지만, 알 수 없는 찜찜함에 희는 ‘1’이 표시된 쓰레기통을 그대로 두었다. 메일의 출처가 떠오른 건 그날 점심시간이었다. 팀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칠 즈음 희는 오전에 왔던 의문의 메일을 대화 소재로 꺼냈다. 아무래도 신종 피싱 수법인 것 같다는 희의 말에, 팀원 막내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맞을 거라고 맞장구쳤다. 막내도 몇 달 전 이런 식의 피싱을 당했었더랬다. 자신이 ‘신체 포기자’인데 ‘자원소비세’가 독촉 메일이 자꾸 온다는 항의 메일이었다. 너무나도 옴 직한 내용의 메일이었기에, 막내는 의심 없이 답장했는데 머지않아 욕설이 가득 담긴 메일이 도착했다. 자원소비세를 내지 않기 위해 신체까지 포기했는데 독촉 메일을 받았다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고 공무원들의 안일함과 무능함을 정치 스트리머들에게 알릴 거라는 협박과 함께 이 사태를 막고 싶으면 개인 메일로 답장하는 끝말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개인 메일로 답장했느냐며, 동기가 묻자 막내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스트리머들에게 잘못 걸리면 안

소설 2025.10.01
썬더스트럭

썬더스트럭 이유리 일 톤 트럭의 조수석에 올라타며, 장석원 씨는 이 모든 것이 몽골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올해는 장석원 씨의 환갑이었으나 그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의견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이 먹은 게 뭐 자랑이라고 호들갑을 떠나 싶은 쪽이었고, 때문에 아들 내외가 선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저 심상하게 글쎄다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오히려 신이 난 건 장석원 씨 아내였다. 더 늙기 전에 여행을 다녀야 한다고 우기며 패키지여행을 보내 주기로 확답을 받아 낸 것도, 밤낮으로 홈쇼핑 채널을 시청한 끝에 최저가라는 삼박 사일짜리 몽골 여행 패키지를 찾아낸 것도 아내였으니까. 그리하여 여행 날짜가 착착 다가왔으나 장석원 씨는 여권 갱신이며 짐 챙기기 등의 잡다한 여행 준비를 아내에게 내맡겨 버렸다. 심드렁히, 지난 육십 년간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성실하게 살았고 결혼이며 육아며 내 집 마련과 부모 봉양, 아무튼 남들이 하는 건 다 했지만 그중 스스로 원해서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가 주선한 선 자리에 나온 비슷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했고 장인어른이 철학관에서 받아다 준 이름으로 첫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가진 돈으로 넘볼 수 있을 만한 동네에 집을 샀고 거기서 십오 년을 살다가 아내의 불평에 리모델링해 십오 년을 더 살았다. 몽골 여행도 그에겐 마찬가지였다. 썩 내키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원하지도 않았다. 여행 전날, 기대와 설렘으로 전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던 아내와 달리 장석원 씨는 평소처럼 눕자마자 잠들었다. 그러나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서도, 몽골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는 잠만 잤다. 눈을 뜨고 있었던 건 오직 기내식을 나눠 줄 때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그가 받은 비프 도시락이 너무 달아 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걸 깨닫자마자 뚜껑을 덮고 도로 잠들었으므로 오 분도 안 됐을 거였다. 칭기즈칸 국제공항 입국장에는 몽골인 가이드가 여행사 로고가 쓰인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내외는 함께 여행을 할 사람들과 안면을 텄다. 총 여덟 명의 한국인들은 모두가 쌍쌍이 부부인 데다 나이도 전부 비슷한 듯했다. 가이드는 양 떼 몰듯 그들을 공항 밖으로 데리고 나가 미니버스에 태웠고 출발한 버스 안에서 여행 일정을 간략하게 읊어 주기 시작했다. 테를지 국립공원에서의 몽골 대자연 관광, 무슨 사원과 무슨 박물관, 고비 사막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멋진 무슨 사막‧‧‧ 그리고 게르에서 자고 허르헉을 먹으며 유목민 생활 체험‧‧‧ 및 기타 등등. 장석원 씨는 창밖을 바라보며 심상하게 생각했다. 저 아가씬 생긴 건 토종 몽골인인데 한국말을 참 잘하는구먼. 첫날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배정받은 게르에 짐을 풀자마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많은 일들을 했으나 크게 즐거운 건 없었다. 커피는 쓰디썼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으며 물건들은 죄다 너무

소설 2025.10.01
누군가

누군가 윤단 복합 상업 시설과 연결된 M역은 도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날씨는 덥고, 광장은 소란스럽다. 이보는 보도를 건너 역 앞 광장에 들어선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캐리어를 가까이 끌어당긴다. 이보 앞에서 걷던 여자아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본다. 엄마, 하늘이 너무 가까워.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아끈다. 하늘에는 낮게 깔린 잿빛 구름이 무거운 이불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보는 그러게, 하고 속으로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보다 가까워진 것도 같다. 최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 목이 뻐근하다. 뒤에 있던 누군가가 짜증을 내며, 잠시 멈춰 선 이보의 등을 밀치고 지나간다. 아이와 아이의 엄마도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광장을 가로지르던 즈음 주미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열차를 탔느냐는 물음이다. 이보는 나중에 답장하기로 한다. 예매한 열차는 놓쳐 버렸다. 도로가 군데군데 통제되어 여기까지 걸어 오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제 주미는 가족과 함께 열차를 타고 친척이 사는 지역으로 갔다. 그리고 이보는 주미가 있는 곳으로 간다. 이보에게 친구는 주미뿐이다. 다른 친구들은 하나둘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보는 이따금 주미를 찾는다. 전화를 걸고, 만나자고 하고, 딱히 할 일이 없는데도 같이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스무 살에 만나 십오 년을 알고 지냈다. 나이가 들며 달라진 점도 있지만 어쨌든 만나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보와 달리 주미는 다른 친구들이 있다. 무엇보다 가족과 무척 끈끈하다. 그것이 이보는 언제나 신기하고, 부럽다. 잠시 후, 하늘에서 붉은 방울이 두둥실 날아오듯 떨어진다. 자두 크기의 붉은 방울은 비눗방울 모양으로 둥글고 윤이 난다. 곧 광장에 있는 모두가 어수선하게 흩어진다. 이보도 사람들이 달아나는 방향을 따라 뛴다. 캐리어 바퀴가 덜커덩거리며 어긋난다. 얼마 안 가 이보는 뒤를 돌아본다.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붉은 방울이 한 남자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방울이 터지고, 이보는 남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광경을 본다. 가벼운 폭음이 지나간 뒤 잠시간 고요가 흐른다. 사람들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불안한 얼굴로 하늘을 흘끗거리며. 이보도 아무 말 없이 캐리어를 끌며 M역으로 향한다. 가슴이 울렁이지만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알지 못한다. 두려움도, 불안도, 슬픔도 아닌 기묘한 감정이다. 어쩌면, 그새 조금 익숙해진 걸지도. 붉은 방울은 우연히 떨어지는 우박처럼, 예고 없이, 간혹가다 내려온다. 인파를 비집고 매표창구에 다가가자 대기 줄이 지그재그로 길게 늘어서 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보의 차례가 온다. 그녀는 목적지를 말하고, 가장 가까운 시간대 열차를 묻는다. 역무원은 지친 어조로 저녁 출발 열차를 알려 준다. 그게 제일 빠른가요? 네. 다른 건 입석도 전부 매진이에요. 이보는 여섯 시간 뒤 출발하는 열차의 입석 표를 구매한다. 전광판에는 여러 행선지의 출발 시간과 번호가 떠 있다

소설 2025.10.01
내가 아프리카로 갈게

내가 아프리카로 갈게 박정현 1 거울은 화장실에 있다. 거울은 단 한 개뿐이다. 여진은 화장실로 가 거울 속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기다랗고 보기 흉한 상흔이 있다. 미간 좌측에서 시작된 상흔이 콧등을 거쳐 움푹 파인 오른쪽 볼로 강처럼 흐른다. 상흔의 끝부분은 둘로 갈라져 오른쪽 얼굴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하다가 자연스럽게 피부로 녹아든다. 그는 중지로 상흔을 흐르는 방향 따라 매만졌다. 이미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어쩌면 수십만 번 무의식중에 했던 행동일지도 모른다. 상흔은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피부 위로 볼록하게 올라와 있으며, 두께는 일 센티미터 정도에 별다른 감각도 없다.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상흔 주위의 멀쩡한 피부가 가려움증을 동반하며 열이 오르는 것만 같다. 동시에 상흔이 벌어지고, 끊어졌던 두 갈래 길이 이어져 귀와 목뒤로 향하는 듯한 착각도 든다. 여진은 거울을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거울은 이미 그가 일전에 주먹을 뻗었던 곳을 중심으로 금이 간 상태다. 비교적 조명이 얼굴 위로 잘 내려앉는 위치를 찾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명이 거의 다해 끝이 검게 변한 형광등이 진동하듯 깜빡였다. 셔터를 누르고, 사진을 확인하고, 몇 차례 더 각도와 표정을 바꿔 사진을 찍었다. 변기에 앉아 지금껏 찍은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확대해 가며 살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원히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화면 속의 상흔을 지우는 건 쉽다. 사진 보정 어플리케이션으로 조금만 매만지면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흔을 지울 수 있다. 그러나 거울 속의 상흔을 지우는 건 어렵다. 불규칙한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에게 매달 나가는 각종 생활비를 제하고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은 절망에 가까운 일이다. 여진은 이해할 수 없다. 얼굴의 상흔을 없애는 것이 어째서 코를 높이거나 눈을 키우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더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을 뿐인데 어째서 누군가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척력이 느껴지는지. 거울 속의 상흔을 지울 수 없다면, 화면 속의 상흔 역시 지워서는 안 된다. 솔직해야 한다. 적어도 사만다에게만이라도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왓츠앱을 켜서 사만다와 나눴던 지난 2주간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그녀와 나눈 대화를 반복해서 읽는 것은 상흔을 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이미 무의식적인 습관이 되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아마 그곳은 저녁 무렵일 것이다. 스크롤을 올려 어제 나눴던 대화를 살폈다. 고백하고 싶어. 무엇을? 예전에 올렸던 사진, 사실 제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어. 얼굴에 큰 흉터가 있어요. 나는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큰 흉터입니다. 보는 것은 소름 끼칠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아니.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해. 이후 여진은 답장하지 않

소설 2025.10.01
한뫼의 방

한뫼의 방 김병운 1. 준일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산호에게서 지난주 이사를 마친 한뫼 어머니 얘기를 듣는다. 삼십삼 년 가까이 한집에서 꾸려 온 살림을 옮기는 것이라 짐이 어마무시했다고, 웬만큼 추리고 나누고 버렸는데도 많아서 결국 1.5톤 트럭 다섯 대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잘은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니었겠구나 싶다. 산호에 따르면 이사 당일은 순조로웠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었으나 날씨는 줄곧 흐리기만 했고, 이주 일자 막바지까지 버티느라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도 어머니는 의외로 담담했다.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였다. 이사비에 용돈까지 얹어 주며 고맙다던 어머니에게서 분실 신고가 잇따랐으니까. 어머니는 찾는 게 안 보인다 싶으면 곧장 산호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하는 모양이었다. 포장 이사이긴 했으나 애초에 남이 정리해 줄 수 있는 성격의 살림이 아니어서 일단 되는 대로 욱여넣게 됐는데, 어머니 입장에서는 뭐가 어디에 어떻게 들어 있는지를 몰라 애먹는 상황이었다. 어제는 슈퍼집 여자가 선물해 주었다는 산토리니 마그넷, 그제는 십수 년 전 외상 대신 받았다는 시바스 리갈 양주 세 병, 엊그제는 당장 입으려고 보자기에 따로 싸 둔 여름 옷가지. 산호는 손가락을 접어 가며 분실 품목을 열거하더니, 지난 엿새 동안 단 하루도 그냥 넘어간 날이 없다며 질린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고는 다행히 오늘 신고 건을 제외하고는 전부 찾았다며 안도한다. 오늘은 뭔데? 신발. 신발? 어, 어머니 운동화. 한뫼가 사 준 거라 아낀다고 몇 번 신지도 않은 건데 아무래도 그 집에 두고 온 것 같다고. 혹시 모르니 시간 날 때 가서 확인해 줄 수 있느냐고. 너무하시네. 그지, 너무하시지. 산호는 두 해 전 애인인 영근 씨와 함께 이사 일을 시작했는데, 주로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 같은 소형 가구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이나 요즘에는 팀을 짜 큰 이사도 척척 해내는 중이다. 단골도 적지 않고 주력 플랫폼 평점 또한 5점 만점에 4.98점을 기록하고 있어 이제는 웬만큼 자리를 잡은 것 같다는 게 산호의 자평이다. 최근 한 달간은 한뫼네 집뿐만 아니라 그 동네의 여러 집 이사를 도맡아 진행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바쁜지 지난주에는 산호답지 않게 만나기로 한 당일 점심에 약속을 파투 내기도 했다. 혹시 다른 집 이사도 이렇게까지 AS가 되느냐는 내 물음에 살포시 웃어 보이던 산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아, 어머님이 말이야, 하면서 말머리를 돌린다. 한번 놀러 오라고 하시네. 나? 다 같이. 준일이도 지금 들어와 있다 말씀드렸더니 집들이 겸 보면 좋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준일이 오면 시간을 맞춰 보자고 대답한다. 준일이 일러 준 출국 일자가 당장 다음 주이기도 하거니와 준일이 한뫼 어머니를 뵙는 건 내켜 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건 힘들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일단 준일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하지만 준일은 좀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카페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돌아보나 준일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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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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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솔직한 마음

*아래의 글은 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강연의 강연록을 개고한 글입니다. 은 말과활 아카데미 북클럽 [산책:자]의 일환으로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주간 진행되었습니다. 내 솔직한 마음 현재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바이런의 격언, ···이라고 알려진 격언 1. “My soul is dark!” 솔직한 사람들은 이기적 오늘 제가 다뤄 볼 시인은 김수영이고요, 그리고 주해할 시는 「풀」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인이고 너무 유명한 시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고백’.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고백의 달인이었습니다. 숨기는 게 좀 나을 법한 일상적인 치부까지도 굉장히 적나라한 발화로 시에다 풀어내곤 했었죠. 그런데 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나 봐요. 예를 들어 「성(性)」 같은 시에는 외도를 비롯한 시인의 성생활이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의 출판사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른 아침이면 아내인 김현경 여사에게 전날 밤 다른 여성과 동침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었더래요. 눈까지 반짝여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김현경 여사는 또 그 얘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재미나게 들어주었다고 하고요. 서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기보다는 약간 닳고 닳은 부부간의 기싸움 같기도 한데, 하여간에 이런 고백은 생전에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상대방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솔함이죠. 그러니까 김수영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 살다 보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들 있잖아요? 좋으면 좋다든지, 싫으면 싫다든지, 도대체가 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 김수영이 딱 그런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좀 완전 반대인데, 면전에서는 눈치 보느라 쩔쩔매다가 집에 가서 끙끙 앓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도 좀 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사장님이 저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거예요. ‘하아···.’ 뭐지? 손님 나밖에 없는데. 혹시 방금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제가 독서대 들고 다녀서, 갈 때마다 허름하게 이거저거 펼쳐 놓고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항상 역지사지해 봅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좀 안 들리게 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심기가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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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류수연 2020년대 한국 문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첫 번째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문학 이후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오랜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은 동시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외연을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넓힌다면 한 사건이 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OTT 오리지널 영화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문학의 일이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지극히 문학 그 자체의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문학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지 않은가?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니니 미디어믹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OTT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현 단계 한국문학과 한국적 이야기가 전 세계인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다. 그 사이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문자 ‘K’로 지칭되는 K-컬처가 놓인다. 이 연재에서 나는 ‘K’를 화두로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그려낸 스토리텔링의 3가지 국면을 탐색하고자 한다. 1. 바깥, 또 다른 중심 스토리텔링으로서 한국문화를 말하는 첫 번째 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키워드는 한강이 아닌 K-pop이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결국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을 둘러싼 모든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의 세계인이 실감하고 상상하는 한국문화의 첫 장면은 매력적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K-pop 퍼포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pop의 성공은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세계 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는 한국이 이토록 많은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엔 수많은 ‘왜&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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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양의성(Ambiguity)

한강의 양의성(Ambiguity)1) 후쿠시마 료타(福嶋亮大)2) 한국어 번역: 정창훈 1. 우선 한 가지 밝혀 두자면, 나는 한강의 열렬한 독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가 주제화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한강의 서술 방식 또한 종종 암시적인 측면이 있기에 읽어 나가다 보면 구름을 잡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그녀가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이며 그것이 문장에 추진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모든 작품에서 소재나 주제에 적합한 서술 방식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그녀의 문학이 일본에서 수용되는 방식을 보면, 전반적으로 비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위화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시적(詩的)’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녀의 문체가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않고 무조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그러하다. 그러한 평가를 하고 싶다면, 글쓴이가 먼저 ‘시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히 꾸밈만 있고 내용이 없는 문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책임을 갖고 확실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한강을 둘러싼 일본 독서계의 분위기는 ‘아픔’이나 ‘상처’나 ‘회복’과 같은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누구나 안심하고 입에 담을 수 있는 클리셰를 동반할 뿐이며, 개별성・비판성을 결여한 채 모호한 안개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에 관한 일본인들의 비평은 대체로 판에 박힌 듯이 이러한 클리셰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현재 일본에서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이 빈번히 언급되는 반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구의 독자들이라면 그래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독자들이 한강이 묘사하는 ‘아픔’을 그토록 쉽게 일반화해도 괜찮은 것일까? 애초에 근현대 한국의 ‘아픈 역사’의 원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카터 에커트의 방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군사주의의 뿌리는 일본 육군의 사관 교육에 있었다. 군사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본래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규율과 가치관을 주입받은 군인이었다. 따라서 ‘개발 독재’를 기축으로 하는 그의 국가 형성 사업은 “항상 현저한 군사적 색채”를 띠었고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국가 프로젝트가 군대식으로 행해졌으며, 그 영향은 한국 사회 곳곳에까지 미쳤다”고 한다.3)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에서 다뤄진 1980년 광주 항쟁도 한국의 군사주의적 정신 풍토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전두환의 계엄령 아래 북한의 공작에 의한 치안상 위협을 구실로 삼아 일어난 이 학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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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

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 방승호 1. 레퀴엠 2. 아직 있는 것을 위한: 예기적 애도 3. 거처가 되어 주는: 자기 삭감의 애도 4. 시체들의 말 5. 문학이란 레퀴엠 1. 레퀴엠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레퀴엠.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진혼곡(鎭魂曲)이라고도 불리는, 생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를 위한 노래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모차르트를 떠올리거나 주세페 베르디를 말하겠지만, 이번 작업의 초점은 레퀴엠의 현대적 흔적들을 더듬어 보는 일이다. 흔적들은 떠다닌다. 다만 우리가 찾지 않았을 뿐. 레퀴엠은 그 형태를 달리하며, 혹은 변주하며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것이 15세기에 여러 성부의 형식으로 변주되었듯이, 이 시대의 레퀴엠은 더 다양한 이미지가 되어 잔존한다. 원형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죽은 이가 죽어서도 세계에 존재하듯이 원형은 몰락하였더라도 그것은 이미지가 되어 세계에 기생한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도사리는, 잠재적 가능태로서 숨죽인 기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레퀴엠은 죽은 자의 죽음을 위로하는 일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하는 일에도 쓰인다. “Dona eis requiem(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이것은 타자를 기억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부여하려는 주문이기도 하다. 기억과 애도는 호출과 재생을 야기한다. 응답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호명하고 증언하며 기록을 거듭하는 일이 때로는 제한된 해석 바깥의 사건을 일으킨다. 상징이 이미지가 되듯 레퀴엠은 파생된다. 형식적 애도 바깥에서 주체의 출현을 예비하는 시도로서 레퀴엠은 변이된다. 들뢰즈가 말한 해석 자체를 전환시키는 해석, 다시 말해 관습 바깥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행은 정형화된 애도에서 탈피할 때 비롯된다. 의식과 실천이 범벅되는 그 경계로부터 현대식 레퀴엠은 다시 꿈틀댄다. 문학이란 이름의 레퀴엠이 모습을 드러낸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라는 전제를 뒤흔들면, 관행의 중력 바깥으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위한 형식. 자기 삭감의 형식으로 뒤틀린 채 존재하는 양태. 오히려 이러한 지점들이 레퀴엠을 작동하는 작금의 방식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을 레퀴엠이라는 이름 아래 포섭하자는 말은 아니다. 타자에 대한 애도라는 명분으로 다시 정형화된 그 관습 이면의 무엇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문학은 늘 질서 바깥의 것을 주목해 왔으며, ‘문학적인 것’은 그 양태들과 함께 뒤섞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레퀴엠으로부터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닐지라도 주체와 타자로 호명되는 그 이분적 질서 사각지대에 애도 대상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죽음으로 호명된 타자는 잠시나마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되지만, 죽지 못한 존재는 타자라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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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자리 2

비평의 자리 2 최가은 1. 너는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죽은 작가의 약점과 결점을, 네 작업에 알맞은 누추한 진실을 건져낼 수 있는 교묘한 질문들 속으로 그녀를 유인할 것이다. 너는 그 질문들 속에 죽은 작가와 함께 살았던 사반세기 동안의 시간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은밀한 함정들을 설치하여, 그녀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 속임수와 거짓말에 치가 떨릴 것이고, 그날 너를 집으로 들여놓은 것을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게 진실의 일부를 공유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너는 미열 같은 흥분 속에서 응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초인종 소리가 멎었다. 너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여전히 저택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문은 완강하게 잠겨 있었다.1) 소설은 ‘죽은 작가’라는 기호 아래 결집하고 흩어지는 ‘너’의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언가를 좇는 자. 불가해한 형태로 유폐된 어떤 진실을, 진실의 환영을, 혹은 환영을 덮치는 기억을 추격하는 자이다. 누추한 진실을 누비기 위한 거짓, 투명한 거짓을 뭉개기 위한 진실 사이를 정신없이 횡단하는 ‘너’는 그 무언가의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다시, ‘너’는 누구인가. ‘죽은 작가’에 관한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는 중이라는 ‘너’는 그의 문학적 “유산”을 “냉혹하게 적출”하는 “문학적 해체”, 혹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문학의 우상을 살해하는 퍼포먼스”2)를 준비하는 자이다. “숭배”와 “모독” 사이의 간극과, 그 간극을 오가는 자의 공포를 요란하게 발설하며 초조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자이기도 하다. ‘너’는 은밀하게 설치한 네 함정에 의해 ‘죽은 작가’와 ‘죽은 작가의 아내’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작가’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선 ‘앎’과 ‘진리’를 확보한 것이 ‘너’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로부터 진실에 관한 특권적 “의무”를 지닌 그들의 미래,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이다. 곧 맞이하게 될 무력하고 무지한 과거의 몰락 앞에서 흥분한 현재는 초인종을 누른다. 한 번, 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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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5.11.01
우리의 고백

우리의 고백 - 진은영 『고백』 (문장웹진 2010년 11월호 수록) 읽기 이영주(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시 쓰기는 재미있다. 인간의 언어란 흥미로운 것이니까. 인간의 언어란 오염과 환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그것을 이상한 쾌락으로 즐기게 해 주는 수수께끼의 세계. 시는 이런 언어의 가장 예민한 촉수이다.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가고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 내부에 가장 깊이 침투해 있다. 시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이런 멀고, 가깝고, 깊은 주름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 존재들. 시인들은 주름을 펼쳐 보이고 때로 섬세하게 접기 위해 늘 몸이 열려 있다. 열린 몸이란,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고 황폐하고 어지럽고 축축하고 미끌거리고 우수수 돋는‧‧‧ 아무런 규정도 할 수 없는 무정형의 상태. 시인들이 몸을 열고 받아 적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고백 진은영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에 대해 나의 가득한 입맞춤을 대신하는 가을 벤치의 연인들 나 대신 식물원 화단의 빨간 석류를 따고 있는 아이의 불안한 기쁨과, 나 대신 구불구불한 동물내장을 가르는 칼처럼 강, 거리, 언덕을 불어 가는 핏빛 바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달콤한 술 향기의 전언을 빈틈없이 틀어막는 코르크 마개의 단호함과 확신에 대해 수음처럼 또다시 은밀해지려는 나의 슬픔에 대해 할 말이‧‧‧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나 대신 울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잠깐 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인인데 시인이 아닌 채로 살아야 하는 순간들에 대하여. 내가 생활의 우악스러움을 드러내면 누군가 내게 시인 아니에요? 라고 미묘한 공격성을 띠고 물어볼 때, 그러니까 시인은 삶에 대해 초연해야 하고, 가난도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슬픔도 웃어넘기는, 여유로운 포즈로 뭐든지 받아안고 가는 존재여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강요할 때, 그러니까 시인이 (과장해서) 영양실조에 걸려도 역시 시인이란 그런 존재지‧‧‧ 하고 동정의 포즈를 보낼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할 때(전근대적인 낭만성이 아직도 있긴 하다‧‧‧), 나는 시인 아니에요? 라는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깊은 함정에 빠진다. 시인은 원고료나 특강비 등 돈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일종의 허상에 가까운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여러 시선에 대하여‧‧‧ 나는 종종 공중누각에 던져져 온몸이 찢겨 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 시를 쓰지 않는 순간들이 더 많은 ‘나’의 생활과 삶은 어떻게 하지? 그 생활과 삶의 세부들이 모여 하나의 시를 탄생시키는데, 결국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도 시를

기획 2025.11.01
간결하고도 복잡한

간결하고도 복잡한 이주란 헤밍웨이의 소설 「깨끗하고 밝은 곳」에는 카페 손님들이 모두 떠난 시간까지 전등빛 아래 앉아 집에 가지 않는 노인 한 명이 등장한다. 박인성 평론가가 그 노인과 겹쳐보였다는 뜻은 아니다. 노인과 그는 좋은 손님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많이 취하면 돈을 내지 않고 가는 버릇이 있는 노인과 달리 그는 우연히 카페에 들른 친구에게 종종 커피를 사는 버릇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몇몇 날 내가 보았던, 박인성 평론가와 그를 둘러싼 풍경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1. 서울역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일주일에 절반은 부산에서, 나머지 절반은 서울에서 움직인다고 한다. 나는 그가 부산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는 목요일 저녁, 7시 18분에 도착하는 열차에서 내리는 그의 표정을 관찰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 광장 앞에서 한 사람이 END가 아니라 AND, 명심해라 이것들아, 하는 행동은 꼭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 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을 지나쳐 역사 안으로 들어가면서는 어쩌면 END가 아니라 AND,가 아니라 AND가 아니라 END라고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후 열차를 타기 직전까지 세 개의 수업과 세 개의 회의를 마쳤고 먼 거리를 이동했기에 짐도 좀 있고 다소 지친 표정일 거라 짐작한 것과 달리 그는 크지만 무겁지 않은 가방을 왼쪽 어깨에 걸친 채 바쁘지 않은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회색 쓰리피스 수트와 똑딱이 체크 셔츠를 입은 그는 플랫폼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에스컬레이터 안 타세요? 저는 그냥 계단으로 갑니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사람들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 속에 뒤섞여 그는 빠르게 걸었다. 이제 어디로 가세요? 오늘은 성수로 갑니다. 그는 여러 개의 출구 중 맨 오른쪽 출구를 향해 걸었다. 걸음걸이는 눈에 띄는 것 없이 평범했으나 힐리스라도 신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내 기준 너무)빠른 걸음이었기에 그의 마음은 이미 성수에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왜 이렇게 빠르세요? 진짜 눈을 감고 간다면 이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익숙한 길이죠. 서울에 오면 저는 보통 성수 아니면 상수에 있는데요, 상수에 갈 때는 삼각지역에서 갈아타거든요. 삼각지역에서 상수역으로 갈 때는 맨 끝에서 갈아타면 빨라요. 성수로 가면서 상수로 가는 길을 설명하던 그는 상수로 갈 때 절반쯤은 가야 할 맨 끝의 반대편 맨 끝으로 가는 결정을 하는 바람에 더 먼 길을 걷게 되곤 한다고 말했다. 걷기의 날들이죠. 차라리 중간에서 타는 게 나으려나. 늘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려요. 틀리면 무슨 생각을 하시냐고 물었더니 내가 그렇지 뭐, 하는 생각을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앞서 걷던 그에게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 그래. 거기서는 삼십 분쯤 있을 것 같은데 너도 그때까지 있게 되면 봐. 간결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은 그는 내게 저리로 가서 2호선 타고 가시면 돼요, 간결하게 말하

기획 2025.11.01
파고

파고 한영원 그날, 은선 씨가 나를 데리러 와 주었다. 은선 씨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빨간 잠바를 입고 갔는데 은선 씨 역시 빨간 카디건을 입고 있었기에 차에 타면서 멋쩍게 조금 웃었다. 은선 씨는 내게 음악 하는 A와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고 난 그렇다고 대답했다. 은선 씨가 자신이 그와 친구라고 대답해서 나는 어쩐지 그 둘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조근조근한 어조와 노래를 부를 때 예쁠 것이 분명한 음색이 비슷하다고.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을 때 그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마음대로 상상해 버린다. 그리고 잘 부를 것 같은 목소리를 짐작하고 그러한 짐작은 대부분 잘 맞는다. 차는 영종도로 들어가고 있었고 공항 가는 목적이 아닌 영종도 놀러 가는 일은 꽤 오랜만이라 생각했다. 은선 씨가 내게 말했다. 바다를 좋아해서 자주 가요. 아, 저도요. 그렇게 대꾸했다. 나는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인천에서 태어나서인지 내가 여태껏 본 바다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차는 영종도 안에 작은 섬인 무의도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해루질을 하러 가나요? 내가 묻자 은선 씨는 첫 만남에 해루질을 좀 그렇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것도 꽤 시인 같고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시인을 관찰하러 간다니 나의 소설가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 멋있을 것 같아. 비 오는 해변을 마구 걸을 것만 같고···, 라고 말한 적 있다. 나는 당신에게 시인이란 그런 이미지냐고 물으려다 그냥 관두었다. 물론 나는 시인이 되기에 조금 모자란 것만 같지만 은선 씨는 정말로 시인이다. 시집을 몇 권이나 냈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시인. 은선 씨는 내게 오늘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일단 엄청나게 맛있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갈 거예요. 그리고 갯벌을 좀 걸을 것이고요. 갯벌은 모래펄이라 부드럽고 더럽지도 않아요. 은선 씨의 계획은 멋져 보였다. 나는 어떤 것이든 좋다고 말했고 근사한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더 섬의 안쪽으로 몇십 분 들어간 뒤 우리는 곧이어 무의도에 있는 한 식당의 주차장에 내렸다. 나는 내리며 언뜻 식당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길래 영업을 하나 보다 했으나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였다. 들어간 사람들과 우리는 불이 꺼진 식당 안에서 화요일은 영업을 안 한다는 문구를 보곤 헛웃음을 지었다. 식당에서 나오며 은선 씨는 그럴 줄 알고 다른 식당 두어 군데를 더 찾아 놓았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차에 탔다. 은선 씨는 내게 식당에 가면 메뉴를 많이 주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다 먹지도 못하면서 음식 욕심은 많아요. 나도 조금 그런 편이라 답하고 우리는 깔깔 웃었다. 그러나 은선 씨가 두 번째로 찾은 식당 역시 닫혀 있었다. 은선 씨는 당황해하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고 했다. 나는 아까 지나가다가 보인 그 쌈밥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은선 씨가 고개를 끄덕

기획 2025.11.01
안산 산책

안산 산책 -소설가 정용준 씨의 일일 글‧그림 도재경 설레는 아침입니다. 저는 지금 한 연구실 앞에 있는데요, 굉장히 조용하네요.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독자 여러분이 좋아하는 소설가이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정용준 작가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평소 너나들이하는 친구지만 오늘은 작가님의 그림자가 되어 어떠한 일상을 보내고 계시는지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평소 작가님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책을 통해 접하거나 넌지시 들은 적은 있지만 작업 공간을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라 무척 두근거립니다. 자, 이제 그림자가 될 시간인데요, 노크를 해 보겠습니다.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리네요. 은은한 커피 냄새가 코끝에 스칩니다. 때마침 커피를 내리고 계셨군요. 안녕. 작가님은 생글생글한 미소로 저를 반깁니다. 어떻게 지냈어? 예나 지금이나 작가님은 한결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작가님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기에 앞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열심히, 구체적으로 듣습니다. 작가님의 동그란 두 귀에 얼마나 많이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미주알고주알 근황을 늘어놓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이십여 분 후에 오전 강의가 시작될 예정이라 여담은 저녁에 나누기로 하고, 저는 작가님의 그림자로서 본분을 다하며 잠자코 곁에 있을 거라고 약속합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스피커에서 잔잔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네요.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실내는 아늑한 카페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합니다. 반면 작가님은 정말 분주합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하는 중인 것 같아요.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자 연구실을 슬며시 둘러봅니다. 책장엔 문학, 철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는데요, 단연코 소설책이 가장 많이 눈에 띄네요. 작가님이 읽은 책들에는 어떤 메모가 적혀 있을지 정말 궁금한 거 있죠. 하지만 그림자가 제멋대로 움직이면 곤란할 것 같아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립니다. 또 다른 책장에는 손때 묻은 공책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데 마치 오래된 책을 보는 듯합니다. 다시 한번 펼쳐 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릅니다. 블라인드가 쳐진 쪽창 아래엔 통기타와 전기 기타가 세워져 있고요, 통창을 가린 광목 커튼에는 아기자기한 엽서가 붙어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 소설의 표지 엽서도 보이네요. 그 옆 나무 선반에는 여러 색깔의 도미노를 쌓아 놓은 듯한 일고여덟 개의 키보드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접대용 탁자 위에는 매끄럽게 깎아 놓은 한 다스 분량의 연필이 필통에 꽂혀 있고, 머그잔에는 알록달록한 사탕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어쩌면 소설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연구실에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을 때 그 사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땝니다. 타닥타닥. 작가님이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사실 제가 가장 기다렸던 순간인데요.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가님의 손을 카메라에 꼭 담고 싶었거든요. 우리가 좋아하는 수많은 소설을 쓴 그 손을 말이죠.

기획 2025.10.01
무한히 증가하는 숫자의 방

[문장웹진 REWIND] 무한히 증가하는 숫자의 방 -서유미 「검은 문」 (문장웹진 2012년 3월호 수록) 읽기 편혜영(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검은 문」을 처음 읽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이자 ‘벽’에 관한 정보이다. ‘문에 손을 대지 않는다’를 규칙으로 가진 이곳은 소등 후에는 방 사람들이 돌아가며 출구 앞에서 불침번을 서는 규칙-그러고 보면 규칙이 많은 곳이다-을 가진 공간이기도 하다. 갇힌 사람들은 출구로 끌려 들어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어서, 출구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소설을 읽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도 이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문’보다는 ‘숫자’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 방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세 사람, 211번, 123번, 99번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벽돌을 돌리며 의미 없이 ‘숫자’를 올리는 작업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낸다. 세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진한 향을 풍기는 박하 맛 사탕을 습관처럼 먹으며 손잡이를 돌리고 숫자를 증가시키는 무의미한 노동에 열중하며 하루를 보낸다. 도대체 숫자만 끝없이 증가하는 벽돌의 손잡이 돌리는 노동은 왜 계속하는 걸까. 이 단순한 노동의 반복이 그들에게 즉각적인 대가를 건네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노동’은 좁고 무료한 공간에서 그들의 존재 의미를 형성하는 요소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더 큰 숫자를 얻고 싶다는 갈망이다. 세 사람은 하루 종일 손잡이를 돌리면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마음의 평화를 회복한다. 원하는 숫자에 닿지 못하면 부족한 수만큼 불행해진다. 하지만 열심히 돌려도 원하는 숫자는 항상 앞서 있기 때문에,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 대도 원하는 숫자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간수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자신이 그동안 쌓아놓은 숫자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들은 끊임없이 손잡이를 돌리며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는데, 이는 단순히 시간을 소비하는 행위를 넘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중요한 행위가 된다. 다른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서 숫자에 대한 집착이 갇힌 자들에게 삶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공간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성취는 조금이라도 높은 숫자를 획득하는 것뿐이다. 숫자가 올라가거나 목표한 숫자에 도달했다고 해서 갇힌 자들의 삶이 달라지거나 실질적인 변화가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맹목적으로 숫자를 올리는 일에 매달린다. 숫자는 그저 그들이 이곳에서 존재하게 만드는 규칙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들은 이 규칙을 따라 무료하고 무의미한 체계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 체계와 처지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폭력이 발생하는 부분도 이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 간수들은 숫자를 통해 세 사람의 행동을

기획 2025.10.01
나의 반려 시

나의 반려 시 정다연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자주 빈집에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맞벌이하셨던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무료하게 창밖을 구경하거나 거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엄마가 간편히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음식을 데워 먹었다. 익숙하게 빈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 두고 티브이 켜 두고는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일기를 쓰고 숙제를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부모님 냄새가 밴 이불을 파고들며 낮잠을 잤다. 눈을 뜨면 여전히 아무 무늬 없는 흰 벽지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일상의 곳곳이 자주 비어 있었기 때문에 늘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은 무언가를 모으거나 기르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첫 시작은 개미였다. 놀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미를 채집통에 담아 와 길러 보겠다고 떼를 썼다. 오후 내 그 안을 관찰하다가 어딘가에서 개미가 좋아한다고 들었던 과자 부스러기나 과일 껍질을 넣어 주기도 했다. 또 한동안은 머리끈에 달린 유리구슬만 모았던 적도 있었다. 간직하고 싶은 구슬을 모으기 위해 부모님 몰래 멀쩡한 끈을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그 후로도 무언가를 애착하는 일은 계속됐다.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 푹 빠져 달마시안 인형을 수집하기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백문조를 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내 마음의 구멍을 온전히 채워 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인형으로 방을 꾸미고 반려동물에게 말을 걸어도 그 구멍은 여전했다.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였다. 그 친구는 나와 이름이 한 글자만 달랐다. 우리는 그게 친해질 이유라도 된다는 듯이 매일 같이 붙어 다녔다. 서로의 집 주변을 오고 가면서 누구와 친했고 멀어졌는지, 아무리 애써도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은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같은 보습 학원을 등록하고 친구가 학원에 가지 않으면 나 역시 가지 않았다. 하루는 공원 벤치에 앉아 어른이 되면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 떠드는데, 친구가 맑은 얼굴로 고백하듯이 말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어. 시가 좋아. 친구가 좋아한다는 시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며칠 뒤 글쓰기 학원에 따라갔다. 그때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시는 그전에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감정이나 대상에 대해 느낀 걸 있는 그대로 쓰면 되었다. 나와 친구가 쓰는 문장은 하나의 답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한 편의 작품을 읽고서도 감상과 해석이 달랐다. 그건 얼마든지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구부리고 펴서 말해도 된다는 걸, 고스란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시가 그것을 읽는 이들까지 염두에 둔다는 거였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는 대신 시 속에 타인이 오고 갈 수 있는 문을 내어 함께 생각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읽고 쓴다는 감각이 가볍고 자유로웠다. 시라는 문을 통해 나의 안과 밖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그 후로 나도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기획 2025.10.01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이훤 이번 여름 나는 지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하루 몇 컵씩 물을 마셔도 몸이 아우성쳤다. 더 많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어쩌면 너무 많은 마음을 쫓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곤란해졌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소화가 안 되고 소화가 안 되면 자연히 몸에 수분이 부족해졌다. 하여 또다시 갈증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내가 평소 불안과 맺고 있는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했다.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위태로워지곤 하는데, 무엇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이미 내가 불안한 사람이었는지, 불안은 어디든 자라므로 그가 날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건지. 불안한 자는 취약해진다. 취약한 자는 더 불안해진다. 어떤 세계는 정확한 수순을 모른 채 이어진다. 불안과 느슨하게 잘 지낼 방법을 찾고 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상주할 것 같다. 불화해 왔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를 반려해 버리겠다. 그런 각오로 방 한편에 앉혀 놓고 달래도 보고, 듣기도 하고, 어깨 위에 데리고 다니며 삼십여 년간 함께의 방식을 찾고 있다.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유 없는 불안. 이유 있는 불안. 타인에게 건네받은 불안. 나의 말과 행동을 놓아주지 못해 자초하는 불안 등 모습을 달리한다. 불안은 상상하기 어렵고 형체 없어서 익숙하거나 귀여운 물성을 입혀 본다. 이름을 붙여 본다. 그러면 조금 더 친해진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조화하는 듯 느껴진다. 이유 없는 불안은 증식을 멈추지 않는 대나무와 닮았다. 키우는 화분이 시름시름 앓는 여름에도 대나무는 쑥쑥 자란다. 땡볕을 견디며 성인 정강이만큼 큰다. 대나무 유형의 불안은 빠르게 자라고 빠르게 퍼진다. 들춰 보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출구를 모르는 숲에 터를 잡은 박새처럼, 나는 대나무 사이를 서성인다. 온갖 나무가 거기 자라고 있다. 내가 쓰이지 않을 거라는 기우. 종이책이 점점 덜 팔리고 희귀해져서 작가란 직군이 줄어들고 사진가마저 AI에게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온갖 크고 작은 걱정이 모두 여기 속한다. 근거 없이도 그들은 자란다. 잘 살고 싶어서 한 번씩 낫을 들고 그 앞에 선다. 뿌리부터 베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숲 전체를 뽑고 싶지만 참는다. 어차피 다시 자랄 것이다. 솎아 내면서 나무들을 한 그루씩 배우고 기록한다. 마음이 기우는 방식을 배운다. 박새가 계절의 풍향을 배우듯. 한편 실체 있는 불안은 재빨리 손을 빠져나간다. 마음을 더디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늦다. 하루가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 직업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도 있다. 작가들은 신간이 나왔을 때 책의 추이를 살핀다. 3년간 쓴 책이 세 달도 안 돼 잊히기도 한다. 중요한 행사에 모객이 잘되지 않을까 봐 마음 쓰기도 한다. 숫자보다는 거기서 일어나는 만남이 언제나 중요하지 않겠냐고 친구에게 말하고, 나도 가끔 돌아서서 북토크 예매 상황을 살핀다. 언제든 작가로서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획 2025.10.01
믹스테이프 원더월

믹스테이프 원더월 임국영 #1 인투로 (이승윤) 무대 위에 록 밴드가 서 있었다. 조명이 드리운 실내 공연장은 마치 화마가 뒤덮은 것처럼 새빨갰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온 듯한 베이스 기타 소리가 인트로 라인을 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보컬이 관객에게 정중히 알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쇼.” 보컬이 말을 끝맺자 일렉트릭 기타 두 대와 드럼이 달궈진 무쇠를 망치가 내려치는 듯한 굉음을 내뿜었다. 관중은 음악에 맞춰 고개나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쏟아 냈다. 리듬을 따라 움직이던 나는 잠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다. 연주 파트가 끝이 날 즈음 고개를 들자 코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어? 이게 왜 내 앞에? 의문이 가시기 전에 나는 그간 매일같이 불러서 입술 끝에 달라붙은 가사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1절 후렴을 끝내고 나서야 온전한 기억을 되찾았다. 맞다. 내가 보컬이었지. #2 나는 왜 (못) “록 얘기 좀 그만 쓰면 안 돼요?”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기 직전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 사람 말고도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조언을 했던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유난히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록 같은 걸 누가 듣겠는가? 당신이 어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주구장창 똑같은 이야기만 하면 질리지도 않는가? 그날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의 말에 사로잡혀 지냈다. 저기요 선생님, 내가 쓰고 싶은 거 쓰겠다는데 님이 뭐 어쩔 건데요, 하는 반발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으레 애주가가 적은 글에는 술이 등장하고 흡연가가 쓴 소설에는 담배 피우는 장면이 삽입되기 마련 아닌가. 작가에게 친숙한 소재가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는 항변을 스스로 되새겼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음미해 볼 만한 화두임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소설을 쓸 때 늘 음악을, 특히 록을 소재로 삼는가. 어째서 한 번도 이 현상에 관해 의구심을 갖거나 깊이 성찰해 본 일이 없었을까? 나에게 록이란 무엇인가? #3 난 알아요 (서태지와 아이들) 당신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은 무엇인가? 라디오, 오디오 플레이어, TV와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거나 부모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이 알려 주신 동요인가? 나의 경우는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재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곡 〈난 알아요〉였다. 힙합 장르를 베이스로 한 댄스 팝에 메탈 요소가 가미된, 네 살 남짓한 꼬마한텐 여러모로 자극적인 노래였다. 얼마나 자극적이었냐면 노래를 듣는 순간 트랜스 상태에 빠진 샤먼처럼 눈이 뒤집혀서 별안간 춤을 췄을 정도였다. 이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내 감정을 멋대로 조종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얼굴도 모르는 이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이 곡을 듣고 있을 누군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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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 문장웹진 중간결산 특집 좌담

[문장서포터즈] 2020년대 문장웹진 중간결산 특집 좌담 ─신인 작가가 바라본 요즘 시와 소설 문장 서포터즈 2기 김이성 1. 안녕하세요. 두 번째 인사드리네요. 지난 9월 1일 게재된 편은 어떻게 보셨나요? 문학이라는 ‘다정한 네트워크’를 매개로 더 많은 분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저의 바람이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가닿았다면 좋겠네요. 저는 1차 활동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2차 원고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어요.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이전보다 더 특별한 활동을 기획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지난 며칠간 《문장웹진》에서 기획했던 여러 콘텐츠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어요. 소설과 시, 비평과 기획, 모색 코너까지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작고 사소하지만 확실하게 《문장웹진》의 지난 20년을 돌아보았지요. 오늘은 《문장웹진》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다가 흥미로운 콘텐츠 하나를 발견해서 여러분들께도 소개해 보려 해요. 바로 2020년 1월 《문장웹진》 ‘기획’ 코너에 올라온 시리즈인데요. 시집, 단편소설, 장편소설 부문으로 나누어 평론가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호명된 작품을 대상으로 젊은 작가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기획 좌담이에요. 해당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을 동료 작가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직접 들어볼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부문별로 해당 시리즈를 살펴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2020년대의 절반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 비슷한 형태로 ‘중간 결산’을 해보면 어떨까. 10년이라는 시간을 총결산하는 것도 좋지만, 중간 시기에 한 번쯤은 어떠한 흐름과 경향이 두드러지는지 파악해 보고 그와 함께 무심코 놓쳐 버린 과거의 작품들을 재조명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곧바로 계획을 세웠지요. 대상 작품은 지난 5년(2020~2024) 동안 《문장웹진》에 게재된 시와 소설로 한정했고, 작년과 올해 각각 《문장웹진》에 첫 시와 소설을 발표한 작가님들을 섭외해 해당 주제를 가지고 함께 좌담을 진행해 보았어요. 아래 좌담을 따라가며 여러분들도 함께 《문장웹진》의 2020년대를 추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2. 이번 좌담은 지난 5년간(2020~2024) 《문장웹진》에 발표된 시와 소설을 함께 읽고 해당 기간 우리 문학을 중간 결산하여 지나간 과거와 나아갈 미래를 동시에 살펴보려는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작년과 올해 각각 《문장웹진》에 첫 시와 소설을 발표한 젊은 작가 두 분을 섭외하여 작품 선정을 부탁드렸고, 그렇게 해서 선정된 9편(시 5편, 단편소설 4편)의 작품을 가지고 함께 얘기 나눠 보려 합니다. 본 좌담에서 언급된 작품은 본문 아래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김이성: 안녕하세요. 문장 서포터즈 2기 김이성입니다. 오늘은 지난해와 올해 각각 《문장웹진》에 첫 시와 소설을 발표한 작가님들을 모시고 ‘2020년대 문장웹진 중간결산 특집 좌담’을 진행해 보려 합니다. 먼저 작가님들 한 분씩 자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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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배우는 교실, 그리고 은하수 같은 무대

[문장서포터즈] 시를 배우는 교실, 그리고 은하수 같은 무대 ― 글티너 대리석, 멘토 성현아·서윤빈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2기 이시우 학교 동아리실 같은 공간 ― 글티너 ‘대리석’ “문학광장 글틴에서 주로 시를 쓰고 있는 대리석이라고 해요.” 인터뷰의 첫인사는 담백했다. 글틴에서 활동하는 십 대 창작자로서, 대리석은 자신을 ‘학교 동아리실 같은 공간에서 시를 배우고 있는 학생’이라 소개했다. 그는 글틴에서 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또래들과 소통하며 글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사진1. 문학광장 글틴(https://munjang.or.kr/teen) 글틴은 한글 ‘글’과 영어 ‘TEEN’이 만나 붙여진 이름으로, 문학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과 소통을 연결하기 위하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05년부터 운영해 오고 있는 국내 유일한 청소년 온라인 문학 플랫폼이다. 글틴의 ‘쓰면서 뒹글’은 글틴 친구들이 쓴 시, 소설, 수필, 감상&비평 장르의 작품을 직접 올리고 공유하는 창작 공간이다. 이곳에 글을 올리면 분야별 멘토들이 각 작품에 댓글로 작품에 대한 의견을 작성한다. 이후 다음 달 중순이 되면 담당 멘토들이 월 장원을 뽑아 주시고 월 장원으로 뽑힌 작품들은 이후 문장청소년문학상 후보작들이 된다. 대리석에게 글틴은 우연히 찾아왔다. 먼저 활동하던 친구의 권유가 계기였다. 학교 내신과 시험 속에서 ‘시’는 언제나 어렵고 난해하게만 느껴졌지만, 글틴에서 만난 다양한 작품들은 그의 시각을 바꾸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쓴 시였는데, 멘토님께서 정성스럽게 피드백을 주셨고, 그 작품이 월 장원 후보에 오르기도 했어요.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진2. 월 장원 후보 선정 공지 멘토링 경험은 그에게 글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양안다 멘토님께서 현대 시 독서가 부족하다고 말씀해 주셨을 때, 머리가 띵해졌어요. 그전에는 시를 시험공부처럼만 접했거든요. 그때 이후로 시를 더 진지하게 읽고 쓰게 되었습니다.” 사진3. 대리석의 시에 대한 멘토링 의견 글틴 속 또래들과의 관계는 아직 서툴다. “카톡방이 있긴 한데 활발히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대신 글틴을 알려 준 친구와 가끔 만나 같이 글을 쓰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여러 사람들의 작품에서 각기 다른 색을 발견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자기 신념을 담아내고, 어떤 이는 고전 시가 같은 문체로 글을 쓰기도 한다. “매일 올라오는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여러 스타일을 접하면서 시 쓰는 재미가 커졌습니다.” 대리석에게 글틴은 단순한 사이트가 아니라, 문학을 처음 제대로 배우게 해 준 공간이다. “학교 동아리실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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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의 매력

[문장서포터즈] 0과 1의 매력 문장 서포터즈 2기 수현 여름을 보내는 각자만의 방식이 있듯, 문학을 사랑하는 것에도 여러 방식이 존재한다. 도서 전시회를 간다거나, 북토크를 간다거나, 한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본다거나. 그중에서도 나는 같은 단편을 읽고 또 읽는 편에 해당한다. 한 게으름뱅이가 꽤나 오랫동안 소설과 시를 즐길 수 있었던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필사와 전자책이다. 무엇보다 ‘북스타그램’ ‘텍스트 힙’ 같은 단어들이 유행하며 이북 리더기를 통한 독서와 필사 다이어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두 키워드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문장웹진》을 통한 독서를 소개하고 싶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의 독서 방법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보려고 한다. 먼저,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다이어리와 펜을 꺼내 든다. 필사. 누군가의 문장을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그 행위는 언젠가부터 나의 오랜 취미이자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언젠가 꺼내 보겠다는 마음으로, 비록 외우지는 못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 새겨 보겠다는 마음으로 한 자 한자 쓰고 있다 보면 작가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왜 이런 단어를 썼을까. 왜 이런 문장 구조를 만들었을까. 하루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필사를 통해 나는 바쁜 삶 속에서 조금이나마 문학을 생각하는 시간을 남겨 둘 수 있었다. 이젠 손으로 문장을 쓰는 행위가 나만의 독서 버튼을 켜는 것과 같달까. 우울한 날이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찾아본다. 내 손 글씨로 쓴 문장을 천천히 읽어 보기도 하고, 처음 마주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종이에 문장을 써 보기도 한다. 달달 외우고 다녔을 만큼 사랑한 문장들이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에는 오랫동안 부대에 담가 둔 술을 열어 본 사람처럼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세월이 만들어 내는 새로움은 또 다른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필사도 좋지만 종종 시간이 부족하거나 손이 아프면 타이핑을 하기도 한다. 문장을 따라오는 생각들을 모두 남기기엔 타이핑만큼 좋은 기록 방법이 없었다. 내가 독서 기록을 남기는 가장 큰 이유는 예쁜 글씨와 다이어리가 아니니까. 언제라도 다시 꺼내 보기 쉬울 것. 나의 필사는 그렇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갔다. 만화책보다 텔레비전, 방송국보다 유튜브 채널들이 익숙한 세대이기 때문일까. 책장에 꽂아 둔 종이책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전자책 어플에서 ‘내가 구입한 도서’ 항목을 훑어보는 것이 내겐 훨씬 익숙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북마크 등록을 해 두며 자주 드나드는 곳은 《문장웹진》이다. 베스킨라빈스의 맛보기 스푼이 있듯, 《문장웹진》에는 다양한 작가와 콘텐츠를 구경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좋은 글이라고 해도 기본 설정에 따라 달리 읽게 된다. 웹진 사이트에서는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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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일상, 문학의 문턱을 낮추다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가온도서관) 책과 일상, 문학의 문턱을 낮추다 가온도서관 송은정 2024년 문학기반시설 상주작가 지원사업을 운영하며 주기적으로 상주작가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저희 일등하는 거 아니에요? 저희가 이번에 해외연수 갈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김병운 상주작가님은 “선생님, 김칫국 금지예요.”라는 답을 돌려주시곤 했다. 그리고 2025년 4월, 가온도서관이 최우수 시설로 선정되었다는 결과발표를 보고 연락을 드렸다. “제 말이 맞죠! 짐 쌀 준비하세요.” 그렇게 도착한 영국에서 마주한 것은 책이 대중 안으로 스며들고, 일상 속에 자리 잡은 광경이었다. 막연히 한국의 작가 생가와 같은 관광지의 형태, 대출·반납 위주의 도서관 형태가 주가 될 거라 예상했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풍경은 전혀 달랐다. 어느 곳 하나 사유화된 곳이 없었다. 누구나 제한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소박하고 편안한 장소들, 그리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참여’의 요소들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영국의 문학 현장은 기념이나 보존, 보관의 장소가 아니라, 접근과 참여의 장소라고 부르는 것이 걸맞았다. 2연수 일정 중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았던 것은 영국문화원 문학 담당 관계자와의 미팅 중의 말이었다. “번역이라는 언어적 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문학은 종이와 펜 그리고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든지 퍼져나갈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오케스트라나 공연처럼 큰 장비나 무대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문학은 더 보편적이고 확산 가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영국 국외연수 일정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도서관 사서로서, 또 문학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책이 일상에 스며드는지’ 영국의 문학 향유 방식을 나름대로 따라가는데 있어서의 길잡이가 되기도 하였다. 영국 국립도서관 The British Library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받은 주요한 인상은 보존과 개방의 공존이었다. 사실 어느 도서관이 이 두 가지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냐마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영국 국립도서관의 노력이 더 와닿았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 희귀·고자료 중심의 폐쇄적 운영에서 벗어나 누구나 패스를 발급받아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체계로의 전환, 그리고 수장고 자료의 신속한 제공(신청하는 모두에게)과 디지털 제공을 병행해 이용의 시공간적 제약을 낮춘 점이 인상 깊었다. 생활권 단위의 원 마일 커뮤니티 구축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 사업을 운영하면서 도서관을 ‘연구자를 위한 장소’에서 ‘지역 커뮤니티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도 돋보였다. 국립 단위의 도서관이 원 마일 커뮤니티를 중점 사업 중 하나로 보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다. 국립도서관이지만 여전히 지역에 존재하는 모두를 위한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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