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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45

2025년 9월호
2025년 9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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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5.09.01
별개의 문제

별개의 문제 박민경 내가 병주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버즈랑? 의외다. 버즈는 친구들이 붙인 병주의 별명이었다. 맞다. 〈토이 스토리〉의 버즈 라이트이어. 크고 동그란 눈매에 능글맞은 입꼬리도 닮았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도 버즈 그 자체이긴 했다. 친구들이 의외라고 한 것도 이해는 갔다. 병주는 나랑 워낙에 정반대였으니까. 간디와 처칠, 잭슨 폴락과 앤디 워홀, 스폰지밥과 징징이, 기쁨이와 슬픔이처럼···. 내가 나쁘게 말하면 방구석 회의론자이자 소심한 현실주의자라면, 병주는 아침 햇살 같은 낙관과 긍정 엔진을 탑재한 채 지치지 않고 광야로 달려가는 로봇이었다. 성향이 정반대인 커플의 경우, 서로의 영토를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는 한 같은 성향의 사람을 만날 때는 느끼지 못한 달콤한 상호 보완성을 경험할 수 있는데 나와 병주가 딱 그랬다. 병주는 나에게 없는 고출력 엔진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감정 기복이 큰 병주의 정서적 지지대 역할이었으므로 우리는 함께 있을 때 자신을 더 나은 사람처럼 느꼈다. 그래선지 결혼을 결심하기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나는 우리의 관계성이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잭슨 폴락과 앤디 워홀, 스폰지밥과 징징이···) 우리의 핑크빛 미래를 의심해 마지않았다. 그래서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싸우지 않는 커플은 없다는 진리에 불경하게도 코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우리는 다를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Oh, love is blind···. 어쩌면 사랑이란 두 사람만 맹신하는 종교 같은 걸지도. 하지만 본격적인 결혼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수많은 결혼 선배님들이 고꾸라졌다는 그 수렁 맛집에 우리도 보기 좋게 빠져 버렸다. 병주는 체면을 중시하고 있어 보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유명 브랜드와 격식 있는 예단, 누가 봐도 신경 쓴 티가 나는 살림살이에 돈과 마음을 쏟았다. 반면 나는 허례허식이라면 질색이었고 가성비와 실용성이 우선이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고 자주 불거졌다. 싸움은 집을 계약하고 살림을 들일 무렵 극에 달해서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파혼’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냈다면 정말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식이라는 메인 퀘스트를 해치우고 나서는 동지애가 생긴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싸울 기력이 바닥난 탓인지 일단의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나는 적과의 공동생활이라는 사회 실험에 자처한 피실험자의 마음으로 신혼집에 입주했다. 서로의 예민함이 빵빵한 풍선과 같은 상태라는 걸 알고 있기에 우리는 가능한 상대를 긁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 손톱이 드러나는 순간은 찾아왔다. 사건의 발단은 내가 만든 음식물처리기였다. ‘오천 원으로 미생물 음식물처리기 만들기’라는 영상을 보고 혹해서 다이소에서 흙

소설 2025.09.01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소설 2025.09.01
법의 아름다움

법의 아름다움 길란 출근 시간이 되기 20분 전에 부속실에 도착했다. 우선 판사님들의 책상을 청소했다. 강 판사님의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도 치우고,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있는 사도신경이 새겨진 크리스털도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게 조심히 닦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은 다 외워 버렸다. 크리스털을 닦고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사님께서 읽으시기 편하게 글씨 크기를 키워서 출력한 자료도 옆에 두었다. 남들은 나보고 오버한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게 다 업무 능력이라고 했다. 판사님들께서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을 거라고. 책상 청소를 마치고 책장과 벽에 걸린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정 판사님께서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권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판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럼 좋지.” 그렇게 말하며 판사님은 책상에 앉으셨다. “매번 고마워요. 따로 뽑기 힘들 텐데.” 판사님이 큰 글씨로 뽑은 자료를 들어 보이셨다. “아니에요. 제가 판사님 업무 도와드리는 거로 돈 받는 거잖아요.” 최대한 사교성을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었다. “내년에 부서 바뀌면 어떡하나. 권 기사가 아주 내 버릇을 나쁘게 들여놨어.” 판사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서도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도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드렸다. 판사님들께서는 고맙다고 하시고는 안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인사를 하고 부속실 안에 있는 속기실에 들어왔다. 판사님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법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판사들이 권위적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본 판사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기용 키보드와 공판 자료들을 챙겨 법정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속기사석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부터 60대 남성까지 성별과 나이가 다양했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었다. 곧 검사분들이 재판장에 들어와 검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 판사님께서도 공판 시간에 맞춰 입정하셨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님께서 첫 번째 사건의 번호를 부르고,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기소의 이유를 밝혔다. 횡령죄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법정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소설 2025.09.01
바이킹을 타자

바이킹을 타자 윤성희 1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요일이면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호숫가의 트럭 카페에 가서 삼천 원짜리 커피를 사 먹거나,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정자에 가서 가끔 맥주 한잔을 마셨다. 그게 나에겐 여행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그 장소들을 잃어버렸다. 먼저 정자에 불이 났다. 정자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문 옆에 있었다. 학교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해서 늘 숨을 헐떡이며 등교를 해야 했다. 여름에는 교복 겨드랑이가 땀에 젖곤 했다. 교문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고 거기에는 운동기구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거기서 매일 철봉을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늘 철봉을 했다. 그리고 지각을 하는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지금은 조금 늦는 거지만 나중에는 아주 많이 늦게 된다고. 이제 운동기구는 없어졌고, 아마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겠지만, 정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면 나는 그곳에 갔다.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닭 다리 모양의 과자와 맥주 한 캔을 샀다. 맥주는 텀블러에 옮겨 담았다. 너네는 공부해라. 나는 맥주나 마시지.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몰래 맥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텀블러 안에 술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통쾌했다. 바람까지 불어 주면 근심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자에 불을 낸 사람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시험을 망쳐 기분이 우울한데 정자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나서 그랬다고 뉴스에서 아이는 말했다. 나는 불에 탄 정자 사진을 찍어 민정에게 보냈다. ‘헉, 낙서도 사라졌어?’ 민정이 물어서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자 기둥에는 연경의 낙서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거기서 치킨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 학교는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 치킨이나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는 게 유행이었다. 그날 연경은 닭 다리를 우리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정자 기둥에 이런 낙서를 남겼다. ‘닭 다리 양보한 사람은 평생 복 받을 것!’ 연경은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닭 다리 과자를 살 때 꼭 프라이드맛만 샀다. 핫숯불바베큐맛은 절대 먹지 않았다. 민정에게 새로 정자가 지어지면 같은 자리에 같은 낙서를 하자고 말했다. 민정이 꼭 그러자고 답을 보냈다. 그날 밤에 나는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훌라후프를 하는 꿈을 꾸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보며 서로 웃었다. 삼 년 전, 나는 엄마의 병간호를 핑계로 고향에 왔다. 그 전에 나는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상사인 경리실장이 횡령을 하고 잠적하는 일이 생겼다. 동료 직원과 함께. 퇴근 후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같은 먹방 유튜버를 좋아했다. 그래서 새 영상이 올라오면

소설 2025.08.01
연변에서 만나 샤넬 백을 줬을 뿐

연변에서 만나 샤넬 백을 줬을 뿐 윤보인 “뭐어? 연변이라고? 연차를 내고 거기를 가요?”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회사 대표에게 말했을 때, 옆에 있던 조 실장이 끼어들었다. “갈 수도 있지 않겠어?” “거길 왜 가요?” “으음.” 굳이 자세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조 실장은 팔짱을 끼고 나에게 다가와서 다짜고짜 캐물었다. 내가 별말이 없자, 회사 대표인 자기 오빠를 쳐다보면서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거기 가 본 적은 없는데, 조선족 많지? 또 뭐 있어?” “백두산 있잖아요.” 고작 동갑인 놈에게 머리를 조아려 가며 매달 월급을 챙긴 지 벌써 2년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입사 초반에는 회사에서 왕따를 당했으며, 모욕에 무시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걸 겪었다. 원래 회사 생활이 개 같은 데다 남의 돈 받아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나 말고도 이런 일을 겪는 인간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알겠어. 연차 써.” 대표가 냉담하게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이거 얼마 만에 쉬는 거냐? 주말 끼고 이틀 연차 내면 총 4일을 쉬는 건데, 연변에 가서 종희도 만나고 양꼬치도 먹고 술도 마셔야지. 그래 봤자 먹고 노는 일뿐이었지만, 하필 종희 년이 중국에서 그것도 연변에서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서 산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오빠는 그야말로 개판인 인생을 살았는데, 여동생이라도 타국에서 잘 지낸다면 멀리서 박수를 쳐 줄 수 있었다. 내 나이 마흔이 넘었고, 그동안 가까운 인간들에게 배신을 당했고 이제 정신 좀 차리고 회사를 다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창밖에 있는 개 두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논현동 단독주택이 짱이야. 저 집구석은 얼마나 하려나?” 회사 맞은편 주택은 세월 가는 것도 모른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잘 만나서 그래. 부모 말고 그 위 세대.”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나 오대길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얼마나 잘 만났는지, 돈도 많고 땅도 많아서 이거 친일파 활동을 했나, 남몰래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런 활동을 했어도 남들만 모르면 되지,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과거 할아버지가 어울렸던 사람들이 은행장, 정치인 등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서울의 중심가 뚝섬이며 성수, 왕십리 지역의 땅을 사들였고 할머니와 본인의 외아들, 그러니까 내 아버지에게 많은 땅을 증여했고 그 덕에 나까지 웃음꽃이 피게 되었다. 돈이라는 게 참 좋은 것이어서 어릴 적부터 걱정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너 초장 끗발 개끗발이

소설 2025.08.01
목소리들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소설 2025.08.01
이상한 고리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mi

소설 2025.08.01
보호 구역

보호 구역 김근수 애랑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애랑의 몸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직으로 바다를 막고 선 해안 단애의 절벽에서 애랑이 몸을 놓아 버릴 때, 덕배는 한달음에 마당바위로 달려 내려갔다.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떼를 지어 울었다. 바다 어디에도 애랑의 모습은 없었고 허연 파도가 마당바위를 다그치고 있었다. 덕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신했다. 마당바위 위에서 덕배가 눈을 떴을 때, 깨져 버리는 하늘을 보았다. 덕배가 종적을 감추던 날, 일본 군인 두 명이 돌에 맞고 칼에 찔려서 죽었고, 헌병 분소가 불탔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일본 군인이 몰려와 군홧발로 밟는데도 누구도 덕배의 행방을 말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밟혔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애랑은 죽었고 덕배는 사라졌다. 애랑이 몸을 던졌던 절벽 위에 도라지 두 뿌리가 자라서 긴 세월 꽃을 피워 내었다. G사의 발전소 건설 부지는 B읍 항구에서 해안 단애 넘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방파제 안쪽을 매립해서 들어서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의 장기 전력 수요 조사와 전망에 근거해서 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을 확인했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최적지에 대한 발표와 철회를 거듭하다가 결국 B읍의 북쪽 해안 마을을 최종 선정지로 확정 발표했다. 바다가 깊이 밀고 들어간 마을은 새끼손톱 모양의 백사장을 거느리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산맥의 능선을 배후로 취락하고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 비해 거주 가구 수가 적고 어장의 규모와 어장주의 연대가 비교적 미미하다는 현장 실사팀 보고서를 바탕으로 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되었다. 해병전우회, 읍민발전대책위원회, YMCA, 환경단체는 즉각 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발전소 건설 절대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정부 발표 이튿날부터 B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청정해역 동해안에 발전소가 웬 말이냐 -주민 의견 개무시한 발전소는 전면 무효 도로변을 쓸면서 마파람이 불어오면 현수막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B읍의 허공은 시끌벅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년 전이었다. 마을 이주 계획이 확정되었다. G발전소는 마을 부지 매입과 해안 매립권을 확보했다. 이주 계획의 골자는 23개 취락 가구를 인근에 새로 조성할 부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새 부지는 G발전소가 구입하여 23개 가구에 무상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읍내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허물고 개토하여 새 마을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손무근은 마을 주민 대표단과 회동을 가졌고 한 가구를 제외한 스물두 가구 세대주의 인감 날인을 받은 보상합의서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십수 차례 주민 설명회를 가졌고 보상 문제와 향후 이주 계획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분기에 한 번꼴로 마을회관과 G발전사 현장 임시 가설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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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

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1) -황인찬과 배시은의 시를 중심으로 신은조 1. 왜 그리움은 이 세상에 없는가 이창동의 영화 은 “나 돌아갈래!”라는 외침으로 포문을 연다. 기차가 달려오는 선로 위에서 절규하는 남자 “영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행복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으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후 미쳐 버린다. 그래서 영호의 비명은 만약 시간을 멈추고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때 앞으로만 나아가는 기차의 이미지는 역행을 불허하는 시간의 특성과 매우 흡사하며, 선로에 서서 기차를 막아서는 영호의 행동 또한 시간의 흐름을 멈춰 세우려는 의지의 표명 그 자체라고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흘러가며, 이 장면과 함께 그의 삶은 막을 내릴 것이다. 과거는 그것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매혹적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고향 땅의 꿈을 꾸거나,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주변에 사진, 비디오, 일기와 같은 기록 매체가 놓여 있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지나간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독자적인 물성을 부여하는 이미지들. 시리즈와 같이 과거의 사건들을 그대로 되살려 내는, 그 자체로 노스탤지어인 매체는 대중들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도록 권능을 행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등장하는 미디어·매체·창작물에 드러나는 노스탤지어는 조금 다른 선로에 올라타 있는 듯하다. “베이퍼웨이브2) 음악 장르에 조악한 영상을 짜깁기해 놓은 에스테틱 영상”이 유행하는 현상과, 80년대 미국 올드스쿨 힙합 패션의 대표 격인 펑퍼짐한 바지와 브라탑을 입고 춤을 추는 톱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뮤직 비디오에는 일본 도쿄 외곽의 풍경이 비추어지며, 등장하는 인물은 90년대의 전자 제품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앞서 언급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떨어져 있음은 물론, 실존하는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는 “복고”나 “레트로” 등의 키워드와도 거리가 있다. 이상한 일이라면 일련의 작품들을 감상한 대중들이 해당 영상에 공감하며 심지어는 그리워한다는 것이겠다. 이하림은 시대적, 정서적으로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매개 삼아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현대 매체들의 동향을 “액체 근대(지그문트 바우만)”로 통칭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파편화된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파열된 역사성의 형상이라고 정의한다.3) 세계화와 개인주의로 인해 “집단 기억”이랄 만한 상실의 경험을 갖추지 못한 현대인의 집단적 무의식이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키므로, 경험한 적 없는 것을 기반으로 한 ‘보철 기억’이 그 자리를 메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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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심지아, 『로라와 로라』(민음사, 2018) 이채원 1. 유폐된 모든 것을 향해 글쎄, 라고 답하며 기존의 언어 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목소리를 발화하는 일은 시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시작(侍作)에 있어 고정화된 관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존의 언어가 초래한 대상의 고정된 내부를 새롭게 모색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기존에 상징화된 기호와의 연결 선상 위에서 재구성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실재를 포착하려는 일, 현존하는 이미지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선언을 끌어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여기, 여러 가치가 충돌하는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언가에 실패하고 있는 시인이 있다. 모든 풍경 앞에서 “글쎄”(「부엌의 부흥」)라고 답하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믿지 않”(「여름 자르기」)는다고 말하는 이, 바로 심지아다. 시인은 뭔가를 선명하게 확정이나 확신하는 대신 이탤릭체의 목소리나 상반되는 개념을 배치하고, 동일한 단어를 일관되지 않은 감각으로 무한히 번복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발화하며 언어의 간극을 부러 형성하는 듯싶다. “한 땀 한 땀 꿰매진”(「풍경의 예절」) “단단한 문장”(「우리들의 테이블」)에 의도적으로 틈을 벌리는 듯한 시인의 방식은 현실에서 달성할 수 없는 언어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의미화의 지연으로 연결되며, “언어가 잊은 것들”(「소유자」)에 대해 사유하는 시선의 토대로서 작동한다. 시의 가능성이 새롭고 낯선 목소리로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지반을 허무는 것이라면, 심지아는 언어의 틈새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와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가령 본고에 수록된 시에서 로라, 글쎄, 서랍, 사과와 같은 기표의 연쇄를 통해 “당신은 몇 개의 허용을 가졌습니까”(「소유자」)하고 성찰하듯 던지는 질문이 그러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심지아의 첫 시집 『로라와 로라』을 읽어 보기로 하자.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로라와 로라」1) 부분 표제작 「로라와 로라」를 보면, 로라는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분열하며 증식한다. 로라는 단일한 존재가 아닌 동명이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이름은 다르지만 외양이 유사한 “쌍둥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아가 화자는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 “코끼리”나 “시체”, “외계인”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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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고통과 쟁론 입론 마무리 박동억 1. 인간의 범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고통으로 향하려는 실천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고통은 섬이다. 고통을 겪는 이는 말할 여력을 가지기 어렵고, 듣는 자는 판이한 삶의 입장에서 고통을 오독하며, 사회제도는 고통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결국 모든 존재는 자기 몫의 고통을 홀로 짊어지며, 한 존재가 끝까지 살아 낸 고통은 그의 오롯한 비밀로 남는다. 하나의 고통은 하나의 침묵 속에서 죽는다. 사실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고통은 아주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겪었던 고통을 내가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부끄럽지만 다행이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그러한 욕망을 간절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참혹한 사건과 그러한 참혹을 겪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그것은 고통의 우주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그저 한 줌에 지나지 않음을 죄악으로 느끼게 한다. 수많은 애도 행위와 추모 행사, 그리고 기도는 그저 당신의 고통을 잘 이해했다는 착각을 만들어 낸 뒤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을 합리화하는 과정이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쓴다. 문학은 당신이 ‘아직 여기 있다’라고 말하기 위한 형식, 이 작품의 언어가 당신이 겪는 고통 자체이기를 꿈꾸는 하나의 몽상이다. 물론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설령 그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조차 그들의 고통을 미화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환부를 드러내고 그의 고통을 향하기 위한 단초로서 문학은 하나의 탐구이다.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2004)에서 강조했던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윤리적 소명을 간직한 상태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전쟁터의 적군이나 제3세계의 국민이 그렇다. 버틀러는 미국의 저널에서 이스라엘 병사와 국민을 위한 추모란은 존재하지만, 팔레스타인 국민을 위한 추모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어떠한 선량함은 더 윤리적인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제약한다. 여기서 그가 제안하는 용어는 ‘애도의 서열’1)이다. 애도의 서열이란 이웃은 소중히 애도하고 타인의 죽음에는 반응하지 않는 차별의 원칙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누군가의 고통으로 향하려는 우리의 의지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한 의지의 방향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허수경은 그러한 애도의 서열이야말로 그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임을 자각한 시인이었다. 그는 독일에 체류 중인 한국인 학생이었고, 한국인의 시선으로든 독일인의 시선으로든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은 낯선 이국이었다. 허수경은 2000년대를 전후로 그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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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

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 소영현 사이보그 글쓰기는 본원적 순수함이라는 기반 없이, 그들을 타자로 낙인찍은 세계에 낙인을 찍는도구를 움켜쥠으로써 획득하는 생존의 힘과 결부된다. - 도나 헤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72쪽. 1 은유로서의 미친년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2019)에는 젊은 여직원에게 집요하게 이른바 ‘작업’을 걸고 “사적인 접근”1)이 여의치 못할 때 “공적으로”(200쪽) 폭언을 쏟아내거나 고압적인 태도로 업무를 지시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을 일삼는 남성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만나는 에피소드이다. 그만큼 현실에서 상시 발생하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례에서 정의가 구현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 특히 가부장적 성격이 여전한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이런 일은 대개 불쾌나 모욕감이 쌓인 끝에 여직원 혹은 피해자가 퇴사하는 경우로 끝나게 된다. 그나마도 자발적 퇴사보다 더한 피해를 입는 일이 허다하니, 최소한의 피해로 상황이 정리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흔하디흔한 여성혐오적이고 비윤리적인 상황에 대한 사례 모음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디디의 우산』 속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작가는 화자 김소영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동생 김소리의 입을 빌려, “미친년이 되더라도”(202쪽) 사무실 사람들에게 김소영이 겪고 있는 불쾌와 모욕감,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위협과 불안”(202쪽)을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짚는다. 거꾸로 이해해보자면, 위협과 불안을 말함으로써 그녀 자신이 미친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친년은, 말하자면, 스스로 사회의 상식, 그것은 황정은 식으로는 종종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상식이 된 악의 세계 바깥으로 자신을 내보내는 일이 된다. 여기서 미친년은 상식의 세계 너머의 정상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갖는 말이 된다. 2 낙인으로서의 미친년 미친년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 너머 정상성을 역설하는 말이 된다. 바로 그런 초월성의 획득을 통해서나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이라는 점에서, 삶의 비정상성을 바로잡기 위해 억압적인 사회적 틀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도약이 ‘미친년 되기’라고 한다면, 『디디의 우산』에서 작가도 밝히고 있지만, 그 ‘미친년 되기’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로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그만큼의 의미를 획득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현실의 차원에서 보자면 스스로 미친년이 되는 일보다는 미친년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더 많다고 해야 한다. 미친년이 되기를 원하지 않지만, 미친년으로 지목되거나 명명되어 내쳐지는 일, 어쩌면 ‘미친년 되기&rs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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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파기된 자리에 남은 것

영혼이 파기된 자리에 남은 것 -김초엽과 우다영의 SF를 읽는 한 방법 정의정 1. 소프트 SF, ‘하드’하게 읽기 일론 머스크의 우주 탐사 기업 ‘SpaceX’는 화성을 식민지화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형 우주선 ‘스타십’을 여러 차례 하늘로 쏘아 올렸다. 올해 1월에는 스타십의 일곱 번째 시험비행이 어김없이 실패했는데, 그때 공중에서 분해된 우주선의 잔해물들이 마치 유성우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영상에 담겨 각종 SNS로 퍼져나갔다.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X(구 트위터)에 그 영상을 업로드하며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재미는 보장된다!(Success is uncertain, but entertainment is guaranteed!)”라고 썼다. 이에 대한 주류적인 반응은 긍정에 가깝다. 혹자는 무료로 불꽃놀이를 봤다며 좋아했고, 혹자는 실패에 담긴 아름다움의 역설을 발견하는 식이었다.1) 지난 5월 9차 시험비행에 실패한 우주선의 잔해가 멕시코 땅에서 발견된 사태를 비롯하여 일론 머스크가 전 지구적으로 끼치는 해악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반응들은 감상적이기만 하다. 물론 지금도 어딘가에서 꾸준한 환경 운동가들은 그의 우주 탐사 계획에 비판을 제기하는 중일 터이다. 과학기술을 둘러싸고 생성되는 담론들의 충돌은 때로 우습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어쩌면 이는 라투르적인 의미에서 번역이 만들어 낸 혼합체, 정화된 개념을 넘나들고 교차하는 난맥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2) 경계를 가로지르는 혼합체 중 하나는 과학소설, SF다. SF는 더 이상 문학(literature fiction)과 구별되는 장르픽션(jenre fiction)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매니아보다 더 넓은 독자층에게 읽히며 한국문학 장의 한 경향이 되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스티븐 샤비로는 『탈인지』에서 과학소설이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의 경계까지 탐색할 수 있도록 하며, 인간의 지각 너머에 있는 감수성의 형태들에 간접적으로나마 접근할 수 있게 해줌을 강조한다. SF야말로 인간중심주의적 철학을 넘어서는 미학이라는 것이다.3) 그러나 한국에서 발표된 SF가 과연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설득력과 일관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SF의 장르 문법을 충실히 계승하지 않은 텍스트의 경우, 근미래에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과학적 사실과 기술에 기반하기보다 인문학적 가치와 사유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엄밀한 과학소설인 ‘하드 SF’라고 볼 수 없는 (멸칭의 뉘앙스가 있는) ‘소프트 SF’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다시 샤비로를 참조해서 말하자면, 과학소설의 의의는 직접 체험할 수 없는 개체-존재자의 경험을 유추해 보고 인간종의 우월성과 자기동일성에 대한 환상적 관점을 뒤바꾸는 데에 있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최근 한국의 단편 SF들을 알레고리로만 취급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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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통은 증언되어야 하는가

왜 고통은 증언되어야 하는가 ―고통과 쟁론 입론 2 박동억 1. 고통의 서열 몸에 남은 물의 기억을 다 태우는 당신과 당신 물의 기억이 다 지는 것을 들여다보는 나는 어쩔 것인가 허수경, 시 「불을 들여다보다」 중에서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아니 나 자신이 나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손쉽게 체념한다. 우선 자기 몫의 삶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지쳐 있기 때문이고, 그다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기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중함 때문이다.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은 공감의 여력을 기르기에 충분치 않고, 타인의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거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멀게 느껴진다. 더욱이 내게 뚜렷한 것은 오직 자신의 고통뿐이어서 그것을 벗어나 생각하는 일은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일단 공감할 여력을 갖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말기암 환자에게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이웃들을 심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하루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에게 동물의 고통을 숙고해달라고 요청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타자의 고통을 배려할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고통에는 서열이 있다. 누구에게든 나의 고통은 가장 긴급한 것이고,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고통은 중요한 것이며, 그 밖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서열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우리의 공감 능력은 ‘나’를 기준으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비 카렐이 『아픔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눈앞의 고통받는 자를 연민하지만 그의 고통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림프관평활근증(Lymphangioleiomyomatosis, LAM)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은 것은 서른다섯 살의 일이었다.1) 그녀는 진단받은 지 3개월 만에 폐 기능의 10년 치를 상실했다. 순식간에 삶이 변화했다. 한 층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각오가 필요했고,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꺼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견뎌야 했으며, 잠들 때마다 언제든지 숨이 멎을 수 있다는 공포에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게 되었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병원에 가면 의사는 그녀의 ‘사례’를 진단할 뿐 그녀의 ‘고통’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이 느끼는 아픔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 사람들은 마치 ‘도대체 누가 의사야’하고 묻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그녀의 연락을 불편해했다.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다가도 그녀의 비참한 하루하루를 설명하려고 하면 아예 연락을 끊어 버리기도 했다. 해비 카렐에게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녀를 연민하는 시선이었다. 자신을 가엽게 쳐다보는 눈빛만으로도 그녀가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고 끔찍한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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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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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5.09.01
삶은 곡선이다

삶은 곡선이다 - 염승숙의 「곡선을 걷는 시간」 읽기 고봉준 염승숙의 「곡선을 걷는 시간」은 ‘곡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곡선’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단어이며, 이때의 ‘곡선’은 ‘직선’이 아닌 것, ‘직선’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곡선을 걷는 시간’이라는 제목은 이미-항상 대척점, 즉 ‘직선을 걷는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직선’과 ‘곡선’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곡선을 걷는 시간」은 ‘곡선’의 의미를 해석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부러 그렇게 만들어진 경우를 제외하면, 세상 모든 휘어진 것들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휘어진 것이란 “노인의 굽은 등과 허리, 사춘기 아이의 비뚤어진 성격이나 오래된 연인들의 등 돌린 마음, 사고에 의해 부러진 뼈, 아주 추운 겨울날 주머니 안에서 곱아드는 손, 허리가 꺾인 붓의 단면 등”처럼 유무형의 곡선 형상을 모두 포함한다. 곡선에 대한 화자의 해석은 “부러 그렇게 만들어진 경우를 제외”하므로 결국 여기에서의 ‘곡선’은 원래는 곡선이 아니었던 것이 어떤 이유에 의해 휘어졌다는 의미이다. 화자는 “어쩌면 휘어진다는 건 ‘충격’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진술처럼 그 이유를 정신적․물리적 ‘충격’에서 찾는다. 요컨대 화자에게 ‘곡선’이란 원래는 곡선이 아니었던 것이 정신적․물리적 충격을 받아 휘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이전 상태의 회복, 즉 “곧아지기 위해 일생을 견뎌야 하는 불행한 존재들”로 인식된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사건은 주인공이 “내 아버지의 집이며, 내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붉게 웃다 떠난, 그런 공간”으로 돌아온 것, 즉 귀향(歸鄕)이다. 이때 ‘귀향’은 고향에 돌아왔다는 공간적․장소적 의미보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긍정한다는 정신적 의미에 가깝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아버지에 대해 “이유 없는 분노”를 갖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아무리 팽개쳐도 부서지거나 깨어지지 않는 내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을 알아 버린, 사춘기 아이의 치기(稚氣)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는 아홉 살 무렵 엄마가 식도암으로 사망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한결같은 사람이다. 엄마가 떠난 후 &lsq

기획 2025.08.01
담배와 새치

[에세이] 담배와 새치 서솔 S#1. 아파트 앞의 오피스텔 화단 멍하게 앉아 있던 여자. 무언가 떠오른 듯 가방을 뒤진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빨간색 말보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낸다. 여자는 머뭇거리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손에 쥐어 보지만 불을 붙일 용기는 없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자는 담배를 구겨 가방에 넣는다. 부러진 담배에서 재가 쏟아진다. 스무 살, 나는 이모 집에 얹혀살았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받았던 가장 큰 충격은 발바닥을 뜨겁게 데우는 화장실 대리석의 온기였다. 화장실 바닥에 보일러가 들어올 수 있구나. 그것은 ‘폐업’ 종이가 붙어 있는 단골 카페를 마주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는 사건이었다. 방배동의 방 네 개짜리 브랜드 아파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속까지 가닿는 훈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내 마음에는 야멸찬 비바람만이 몰아쳤다. 흔쾌히 방을 내준 이모가 지금 듣는다면 뒤통수가 얼얼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무렵 나는 어떻게든 집에 늦게 들어가기 위해 아파트 주변을 배회했다. 야심한 시각에 일어나는 술자리에 굳이 참석한다든지, 카페베네에 앉아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시시한 문자를 보내곤 했다. 이모와 이모부가 잠든 사이 들어가는 것이 하루를 끝마치는 일과였다. ‘이모에게 빚을 지고 있다’라는 빚쟁이의 감각은 해가 지면 더욱 선명해졌다. 선명해질수록 무거워지는 감각은 나를 언제나 주눅 들게 했다. 등록금이 너무 비싼 예술대학에 입학한 것은, 아무래도 그 시절 나에게 큰 짐이었다. 아직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졸업하지 않은 시점. 먼저 미대에 진학한 언니를 따라 덩달아 영화과에 진학한 나는 나의 선택이 우리 집의 기둥을 뽑아 먹을까 봐 입학 전부터 전전긍긍했다. 그러면 조금 눈을 낮춰 장학금을 받은 학교에 진학했어도 됐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선뜻 욕심과 타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타협보다는 욕망을 선택한 나는, 그때부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수능이 끝난 친구들이 하릴없이 시간을 죽일 때, 엄마 친구 딸들의 집을 전전하며 영어 과외를 했다. 그렇게 ’입학하면서 용돈을 받지 않은 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이모 집으로 들어갔다. 내방역 3번 출구에서 나와 언덕에 있던 아파트로 올라가던 길. 하늘에 보이지 않는 별을 억지로 찾던 의미 없는 행동은 발걸음을 늦추기에 제격이었다. 서울의 밤은 언제나 칠흑같았다. 이렇게 진행되는 에세이는 무릇, 그 시절 내가 겪었던 슬픈 사연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에세이 주제로 전달받은 ‘스무 살’ 키워드에서 떠올랐던 건, ‘스무 살의 내가 지녔던 비대한 자아’뿐이었다. 당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자아 중, 내가 가장 중요하게 지녔던 것은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너무 고생할 것‘이라는 명제였다. 거기서 오는 자기연민과 우울에는 세상의 중심이 나의 우울함

기획 2025.08.01
날마다 한 걸음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 고수리 상경했던 날을 기억한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대합실을 나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인파 속에 덩그러니 나 혼자. 서울 한복판에 뚝 떨궈진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의 첫인상은 삭막한 회빛, 그리고 몹시 추웠다. 눈이 푹푹 내리던 강원도는 사방이 희고도 따뜻했는데. 나는 목도리를 둘둘 고쳐 매고 한 걸음 내디뎠다. 서울은 복잡하구나. 시끄럽구나. 무심하구나. 아무도 웃지 않는구나. 애꿎은 지하상가를 헤매다 얽히고설킨 출구를 빙빙 돌다가 겨우 개찰구를 찾아 전철표를 샀다. 전철을 타 보는 것도 혼자선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철 손잡이를 붙들고 서서 노선도를 올려다보았다. 풀빛으로 주욱 이어진 선을 따라 도착할 역사는 ‘온수(溫水)’. 따뜻한 물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위안처럼 스몄다. 온수역에 내려 자취방을 찾아갔다. 대로변 가로 이어진 인도를 한참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새겨진 해태상을 맞닥뜨렸을 때,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돌아보니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특별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바로 맞은편에는 ‘어서 오십시오 경기도 부천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경계에 서 있었다. 아니, 이 기이한 기분의 실체는 기시감일지도. 불안하고 난처한 마음 한구석에 익숙하고도 지긋한 체념이 몰려왔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서울과 부천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한 걸음 넘어섰다. 거기에 내가 살 방이 있었다. 내 사정 역시 고학생들의 유구한 상경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집세는 감당할 수 없으니, 학교 근처에 가장 싼 방을 수소문해 들어갔다. 상경해 처음으로 얻은 방은 월세 18만 원짜리 남녀공용 고시원 방이었다. 한낮에도 침침한 복도를 걸어가 방문을 더듬어 열 때마다, 엄마가 이 방을 안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광등부터 켰다. 창문 없는 길쭉한 방. 방문을 걸어 잠그고 웅크려 누우면 어둡고 눅눅한 관 속에 눕는 기분이었다. 얇은 합판을 덧대어 가른 방은 방음이 되지 않았고, 간간이 들리는 기침 소리와 통화 소리, 텔레비전 소리에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 살아 있구나 실감했다. 아침마다 등교하는 대학교는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 있었다. 밤마다 돌아가는 고시원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에 있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3년을 유학하고, 졸업 후에 잠시 강원도 삼척시에서 지냈다. 삼척은 엄마의 고향이자 내가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도시지만, 거기도 선뜻 내 고향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려웠다. 나는 오래전부터 떠돌며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함구해야 할 사정이란 게 삶을 짓누를수록 나는 가벼워져야 했다. 짐 하나만 꾸리면 잠시나마 살아갈 사람처럼, 짐 하나만 꾸리면 언제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갑작스럽고 비밀스럽게

기획 2025.08.01
스물의 체스

[에세이] 스물의 체스 유지혜 생애 처음 체스를 배웠다. 체스는 내 왕을 사수하면서 상대의 왕을 공격하는 전략 게임이다. 내 편에는 총 16개의 기물이 주어진다. 앞줄에는 폰(pawn)이 줄지어 서 있고, 뒷줄에는 왕, 퀸 등 다양한 말들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하며 각 기물마다 고유한 움직임이 있다. 킹(king)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움직임이 적다. 생존이 최우선 인지라 보통 다른 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를 보존한다. 반면 작은 몸집으로 제일 많이 싸우는 건 앞줄의 작은 말 폰(pawn)이다. 그러나 나는 폰의 쓸모를 무시했다. 한 칸씩만 움직이는 폰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비숍(bishop)으로 판을 압도하고 싶었고, L자로 움직이는 나이트(knight)로는 상대가 시야에서 놓친 구석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근사하고도 빨리 이기고 싶었다. 결국 큰 말을 무리하게 내세우다 졌다. 그때 게임을 같이 두던 상대가 내게 말했다. 폰, 이 쫄병을 쭉쭉 내보내는 것도 중요해. 하찮아 보여도 얘가 뭘 지켜줄지 몰라. 체스판처럼 인생에도 전략과 기세, 무엇보다 여러 번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너무 빨리 망하지 말라고, 인생에는 젊음이라는 폰이 주어지는 줄도 모른다. 폰처럼 젊은 날은 가치는 적은 대신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기껏해야 한두 걸음 내딛는 시기. 젊음은 헐값에 좋은 것을 쟁취할지도 모를 기회이다. 하지만 스물엔 그 누구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 있지 않다. 앞수를 읽는 노련함은 없다. 가장 작은 몸집으로 큰 세상을 향해 나가는 폰의 시점일 뿐이다. 스스로의 위치조차 가까스로 가늠할 수 있을 뿐. 좀 더 가면 헐값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불안이 몰려올 수도 있다. 더 대범했어도 되었다는 건 순전히 그 시기를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갓 성인이 된 2011년, 나에게도 스물이라는 핑계로 얼떨떨한 용기를 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도, 술을 마시지도, 첫 애인을 사귀지도,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대신 압구정에 있는 모델 학원을 등록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인 내게 모델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지망했던 대학에 불합격한 나에게는 아득할 만큼 시간이 많았다. 뉴코아 아울렛에서 5만원을 주고 산 빨강색 게스 구두를 신고 몸매를 드러내는 옷차림의 나는 한쪽 벽 전면이 거울인 연습실에서 워킹을 연습했다. 우리 기수에는 타고난 것으로 먹고 살고자 하지만 그렇다 할 독기는 보이지 않는 이십 대 초반 언저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자신감이 충만한 건지 없는 건지 분간하지 어려운, 겉멋이 잔뜩 들었지만 그로 인해 활기찬 사람들이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몇몇 친구들과 나는 금세 친해졌다. 그들은 당시 유행했던 발렌시아가 가방을 어디서 제일 싸게 구할 수 있는지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립스틱의 품명을, 이마 보톡스의 효과를 알았다. 그들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이들이었으나 나는 아니었다. 다들 택시를 타고

기획 2025.08.01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문장웹진 REWIND]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강성은의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문장 웹진》 2008년 6월호) 최하연(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떠오른 첫 문장은 이랬다. 이 첫 문장의 그 앞 문장은 없으므로, 돌아갈 곳이 없으니, 불능의 세계인데, 나는 없는 출발점으로 자꾸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몇 덩어리의 문장을 쓴 뒤에, 원래의 첫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는지도 모른다. 쓰던 글을 재차 읽어 가며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면, 그땐 첫 문장을 또 고치게 될까. 그렇게 고친 문장이 사실 저 앞의 문장이라면―아니 고친 뒤에 읽어 보니 아까 것이 나은 듯싶어 고민 끝에, 원래대로 돌려놓은 문장이라면―출발점 없는 출발점은 글 안에 있고, 여전히 불능한 첫 문장은 불능을 모른 채 남게 될 것이다. 2008년 5월호 문장 웹진엔 강성은의 시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이 실려 있다. 이 글의 진짜 출발점은 사실 여기이다.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은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 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속에서 입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 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 전문 회고가 실패의 알리바이를 지워 내듯, 전망이 이 지울 수 없는 실패의 유예이듯, 지속 가능한 내일에 대한 일반의 믿음 또한 불능을 모르는 불능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언제나 힘이 셌다. 우리는 그것을 산문의 세계로 불렀고, 시는 산문의 세계로부터 이격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 그곳에서 늘 첫 문장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시작한 시는 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산문의 세계로 붙잡혀 돌아오는 “내일의 악몽”이다. 이 정황에는 하나의 커다란 허방이 있다. 누가 누의 내일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되어야만 하는가. 시인은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발견한다. 그런데 빙점은 과연 물의 내일일까, 얼음

기획 2025.07.01
응원의 방식

[문장웹진 REWIND]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해서. 누구에게나 방이 필요하지만 중심인물인 이십구 년 차 중개업자인 김 씨는 “햇빛이 잘 들고 보증금 천오백만 원 정도의 방을 원하는&rdquo

기획 2025.06.01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문장웹진 REWIND]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자연의 질서와 공동체의 관습, 그리고 어민으로서의 노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향’인 것이다. 그러니까 떠날 수 없는 세대와, 어떡해서든

기획 2025.05.01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문장웹진 REWIND]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파문과 파도와 파장으로 기록되는 무늬. 무늬를 밀고 가는 저녁 공기와 그것을 완성하는 밤의 지문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기원이기 때문이다. 2.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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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자유롭게

사랑하며, 자유롭게 -광주 책방 ‘러브앤프리’를 다시 다녀오며 문장서포터즈 2기 수현 여름이 다가왔다. 더위에 지쳐 밤새 뒤척이는 날이 늘어나고, 손 선풍기와 양산 없이 거리를 걷기 무서워지는 시기.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여름을 보낸다. 음악 차트 속에서 더위를 식혀줄 청량감 넘치는 노래를 찾아보기도 하고, 냉장고에 넣어 둔 수박을 꺼내 잘라 먹기도 하고, 서늘한 공기가 가득한 카페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을 뒤적거리다 한때 사랑했던 이의 계정을 몰래 들여다보기도 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시간을 보내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서 한 해 중 가장 뜨거운 시기를 지나는 각자만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가장 먼저 갤러리를 정리한다. 그러나 무언갈 비우겠다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본 처음과 달리,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무엇도 지우지 못한 적이 허다하다. 내게 갤러리는 사랑하는 책들로 빼곡하게 채운 책장과 같았다. 몇 년이 지나고도 곱씹게 되는 소설 『조이』 속 문장. 스무 살이 된 이후 나와 네 번의 여름을 함께 맞이했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Daylight〉 가사. 그렇게 올해에도 지나간 여름의 흔적을 들여다보던 중, 나는 우연히 한 책방에 방문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는 해, 사랑하는 것을 쫓아가겠다는 다짐으로 광주에 왔다. 나는 문학이 좋았던 막연하고도 순수한 마음만으로 소설을 공부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 우연히 양림동을 걷다 발견하게 된 첫 책방이 ‘러브앤프리’였다. 책방 앞에 멈춰 서게 된 건 이름 때문이었다. 사랑과 자유. 내가 문학을 좋아하게 된 계기 역시 그 두 단어와 같았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게 숨 쉴 구멍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끈끈한 취향 공동체를 끊임없이 찾고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기를 반복하곤 했는데, 그마저도 지치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종종 책방을 찾았다. 신기하게 나를 아는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가장 깊은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연한 방문으로 특별한 기억을 선물해 준 곳. 혹시 나와 같이 취향 공동체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 러브앤프리를 소개하기 위해 나는 다시 광주를 찾았다. 가장 먼저 책방 안을 들어서자 ‘사랑하며 자유롭게’라는 문구가 적힌 벽면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책갈피와 인덱스 등 독서 용품을 위한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상품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 벽을 따라 책이 진열되어 있다. 각 도서 위에는 추천 이유, 책을 읽은 소감과 같은 간략한 메모가 붙어 있었는데, 책방지기의 사소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 ‘러브앤프리’라는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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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있는 곳: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문학이 있는 곳: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 첫 번째 편지 문장서포터즈 2기 김이성 1.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여름의 복판을 통과하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시간들을 보내셨나요? 저는 올여름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어요. 이번 도서전 주제는 ‘믿을 구석’이었는데요(그러고 보니 여러분들의 믿을 구석은 무엇일지도 궁금하네요). 운이 좋게도 저에게는 믿을 구석이 여러 개 있죠. 그중 하나가 바로 ‘문학’인데요.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던 것 같아요. 문학은 한 번도 저에게 상처 주지 않았죠. 상처 주는 건··‧ 굳이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요?ㅎㅎ 아무튼 그래서인지 도서전에서 문학책이 유독 많은 사랑을 받는 걸 보고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저는 문학이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어도 한 사람의 삶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는 있다고 믿거든요. 때문에 항상 더 많은 사람이 문학을 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죠. 그런데 도서전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나는 ’문학‘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문학이 있는 곳‘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문학이 있는 곳’이란 때에 따라 사람이기도 하고, 장소이기도 하고, 시간이기도 한데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문학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오늘은 제가 알고 있는 ‘문학이 있는 곳’ 하나를 소개해 보려고 해요. 문학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면서 문학을 매개로 시민들과 가장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문학적 ‘시간’과 자산이 축적되어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죠. 바로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노작홍사용문학관’이에요. 도서전에 다녀와서 느낀 게 있다면 시대와 세대가 변모해 갈수록 문학의 쓰임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이곳 ‘노작홍사용문학관’은 문학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문학의 쓰임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해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상주작가지원사업’ 우수 시설로 선정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 ‘지혜학교’ 시범 사업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문학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문화 진흥을 이끌어 가고 있는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함께 문학과 문학의 다양한 쓰임을 발견해 보는 건 어떨까요? 2. 저는 2025년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 ‘노작홍사용문학관’에 다녀왔어요. 제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문학관 2층에 위치한 ‘기획전시실’에서 최두석 시인의 시(詩)사진전 〈꽃에게 길을 묻다〉가 한창 진행 중이었죠. 시(詩)사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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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품은 도시, 광주

시를 품은 도시, 광주 -제34회 용아 박용철 백일장 르포 문장서포터즈 2기 이시우 1. 초여름, 시의 정원에 들어서다 2025년 6월 21일, 나는 광주 소촌아트팩토리에 도착했다. 소촌아트팩토리는 광주 송정역 근처에 위치한 곳으로, 과거 농공단지의 관리사무실과 민방위대피소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 전시실과 도서실 등으로 개조한 공간이었다. 하얀색 컨테이너 철제 기둥과 유리천장이 혼재되어 있는 곳. 쌀과 무기가 쌓여 있던 공간이 지금은 광주 시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거점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날은 제34회 용아 박용철 전국 백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주제는 ‘초여름 시의 정원’. 이름부터가 한 편의 시 같았다. 문학제는 백일장과 문학 전시, 기념식, 문화 공연, 미디어아트 개막까지 다채롭게 이어졌다. 문학의 도시, 광주의 한편이 조용히 들썩이는 날이었다. 이번 백일장이 특별한 이유는 추계예술대학교 특기자 전형 인정 대회이기 때문이다. 백일장 수상 실적만으로 수시모집에 지원할 수 있는 특기자 전형은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인데(이제 단 2곳–중앙대학교와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만이 남았다), 추계예대는 중앙대에 비해 비교적 많은 백일장들을 인정해 주고 있다. 문예창작과 진학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생들이 많은 만큼, 이번 백일장은 또 다른 입시의 관문이기도 했다. 2. 백일장의 풍경, 고요한 전쟁 문학제와 동시에 진행된 이번 백일장은 시화전 등 다른 행사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즐기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날씨 문제. 계속되는 비로 인해 참여자들은 소촌아트팩토리의 다른 공간들을 둘러보기 힘들었다. 야외에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던 푸드트럭, 그 슬러시 간판 옆에 서 있던 사장님의 표정만이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시간 배분의 문제도 있었다. 보통의 백일장은 오전에 이루어지고, 오후에는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시 낭송 등이 진행되는데, 용아 박용철 백일장의 경우 오후에 시제가 발표되었다. 참가자들은 자기 글만 쓴 뒤, 각자의 우산을 펼친 채 말없이 자리를 떴다. 그래도 백일장은 백일장이었다. 초등부부터 일반부까지, 운문과 산문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나는 고등부 참가자로 광산구지역경제활력센터 건물 안을 배회했다. 지하 1층부터 민방위 교육장까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학생들이 가득했다. 고요한 전쟁 같은 분위기였다. 펜 끝은 바삐 움직였지만, 모두 말이 없었다. 시제는 “약속”과 “그림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단어를 곱씹었다.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막상 쓰려니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백이 두려웠다. 이상하게도 어떤 이야기를 써야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잡을 수 있을까, 어떤 글을 써야 ‘3등 이상의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자꾸 그런 생각들만 떠올랐다. 3.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까요?” &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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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뒤의 설계자, 또는 조언자 ‘북디자이너’

[문장서포터즈] 활자 뒤의 설계자, 또는 조언자 ‘북디자이너’ ―홍선우 북디자이너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2기 김성호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 하면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다소 가려져 있는 존재는 바로 북디자이너일 것이다. 책의 판권 면에 작가와 편집자만 기재되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북디자이너와 마케터 등 말 그대로 책을 ‘만들고’ 온전히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힘쓴 모든 사람들이 대체로 기재되는 편이지만. 나는 북디자이너가 책의 외형을 만들고, 꾸미고, 문자 그대로 독자들에게 가닿는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한다. 동시에 활자 뒤에서 소리 없이 책을 설계하는 설계자라고도. 그러던 차에 이번 문장 웹진 지면을 빌려 평소 친분이 있던 자음과모음 출판사 북디자이너이자 독립 출판을 시도하는 홍선우 디자이너와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Q: 평어로 인터뷰를 하는 것도 처음이고, 북디자이너를 실제로 만나는 것도 처음이라서 조금 떨리네. 너는 어때? A: 나도 평어로 이렇게 대화하는 건 처음이야(웃음).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그래도 이번 기회에 이렇게 대화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Q: 먼저 자신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줄 수 있어? A: 자기를 소개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어디에서 일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나의 일부분이니까, 그걸로만 나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북디자이너가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인터뷰니까 일단 북디자이너라고 소개할 수 있겠네. 홍선우 북디자이너의 대표작 1 (『할도』,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Q: 내가 인터뷰 제목을 지을 때 북디자이너를 활자 뒤의 설계자라고 명명했는데, 어떻게 생각해? 공감하는 편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A: 활자 뒤의 설계자라는 표현이 참 멋있어. 다만, 내가 실무에서 느낀 걸 토대로 생각해 보면 설계라는 표현에 조금 독단적인 뉘앙스가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선 정정이 필요할 듯해. 작가와 편집자, 마케터, 일러스트레이터 등 여러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 책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북디자이너 혼자 설계해 나가는 과정은 아니라고 느껴. 그리고 재미있는 점은, 내가 뭔가를 설계한다고 한들, 언제나 그 의도대로 독자들이 읽어 주진 않는다는 점이야.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자유롭기도 하고, 일방적이지 않아서 좋아. Q: 좋아, 활자 뒤의 설계자라고 이름을 지었을 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구나. 독자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너도 알다시피 요즘은 텍스트힙이라고 해서 책에 주목하는 현상이 있기도 해. 그럴 때 표지에 이끌려 책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단 말이지.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A: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책을 미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반감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이런 식의 접근이 조금 우려스럽기도 해‧‧‧. 그 이유는, 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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