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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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쓰면서 뒹글' 운영 규정(2024.01.02)작성일 2023-10-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858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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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39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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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고다르(론): 고다르와의 대화
고다르의 죽음 : 늦었지만, 이른 늦-초가을의 추도문그러니깐, 2022년 어느 늦여름이었다. 늦여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도보에 떨어진 낙엽이 가끔씩 눈에 들고는 하는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 시기를 무어라 단정짓기 어려운 것이었다. 수요일이었고, 몸이 아파 학교를 조퇴한 상태에서 여느날과 다름없이 영화 한편과(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영화는 아마 테렌스 멜릭의 였을거다) 도서 한 권을 곁에 두고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신의 부고소식을 들었다. “누벨바그의 거장,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하다”기사가 떴다. 당신의 이름은 고다르. 어디선가 스쳐가듯 들어본 적 있었으나, 당신은 내게 어색한 사람이었고, 난 그냥 어정쩡 그 날 오후를 보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들을 지나, 2023년의 겨울 끝자락 무렵, 당신의 영화를 볼 수있었다. 그렇게 본 세 편의 영화. 와 , 그리고 . 당시에는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런 영화가 다 있지, 싶은 정도. 그랬던 나는, 어느새 장 피에르 멜빌을 존경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새뮤얼 퓰러와 프리츠 랑을 사랑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풀어놓기에는 너무 늦은걸까. 당신은 이 세상에 없다. 이 글이 쓰여지기 불과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당신의 압도적인 지력으로 세계 영화사와 시네마의 의미를 탐구하는 걸작 과 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싹 트는데, 내가 보지 못한 당신의 영화는 이제 과 단 두 편 뿐이다. 이제 그 마음마저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일까. 이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나는 그 두 편 보기를 미루고 계속해서 당신의 작품들을 돌려보고 있다.그러던 중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두 편의 영화가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은 . 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건 이번이 두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첫번 째는 칸 영화제였다. 그곳에서 를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가려고 애썼다. 물론 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상영일을 지났을 때, 나는 좌절했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영화가 바로 당신의 것이었다. 이건 내가 시네필로서 당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리고 반년의 시간이 흘러 그 영화가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이 아니면 당신의 영화를 볼 기회는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방학시기와 여행시기가 맞물려 운좋게도 토론토국제영화제에 갈 수 있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건, 당신의 유작이 상영되었던 상영일이 당신의 기일이었다는 것이다. 선선한 저녁이었고, 내가 당신의 부고를 들었던 날이기도 했다. 지금이 2024년이라는 것만 의식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나는 마치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경계에 우두커니 서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누구보다 이 세상에서 강
작성일 2025-03-26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279상세보기 -
감상&비평 '논리 철학 논고' 를 읽고
이 책의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겐 여기서 전달된 사고들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고 보인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지금껏 과학, 철학, 수학, 예술 등에서 알고자 했던 그 본질적 진리를 그 자신이 찾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내가 이 책을 읽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는 결코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다만(그가 정말로 그 문제들의 근본적 답을 찾았는지와는 관계없이) 그가 이런 진리를 찾는데 어쨌거나 철학을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해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껏 인류가 제시한 세계 해석 방식으로서의 거의 모든 학문들은 그 시작을 철학에 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철학의 유물론적이고 경험론적인 한 분야가 분리된 것이고 심리학과 인문학은 최근에야 철학에서 분리되었으며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의학, 역사학 등도 고대에 철학에서 분리되었거나 적어도 고대 철학자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이 점에서 철학은 모든 학문의 시점이며 세계 해석 방식의 시초였다. 그리고 이후 많은 학문으로 나뉘어 지긴 했지만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이 다시금 철학적으로 발견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점에서 그의 주장이 진리에 대한 답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비트겐슈타인은 머리말에서 아마 이 책 속에 표현된 사고들을-또는 어쨌든 비슷한 사고들을-스스로 이미 언젠가 해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이 책은 그러므로 교과서가 아니다.-이 책의 목적은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어떤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달성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전에 그가 했던 사고들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하나의 문장도 그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만 그러한 생각을 전에 해본 적이 없어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의 문장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생각은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해본 생각들을 적어보고자 한다.이 책의 두번째 문장 1.1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나는 이것이 세계가 절대적이지 않고 오직 인식 가능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가 사용한 사물은 말하자면 물리적이고 실존하며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물질이며, 사실은 그 절대적으로 ‘보이는’ 사물을 인식하여 사고되고 정의된 사물이며 상대적이고 인식에 의한 것이다. 만약 세계가 절대적이라면 우리의 인식(여기서 인식은 사고를 포함한 모든 세계 해석 방식이라고 할 때)은 그저 절대적인 세계를 옆에서 관망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가 인식 가능한 세계로 한정될 때 인식은 세계에 앞서며 세계가 더 거대하거나 위대한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인식의 창조물일 수 있고, 설령 그것이 절대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이며 그 정당성은 또한 인식에 기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후자의 세계라는 것은 분명하다.
작성일 2025-03-23 작성자 Ted 좋아요 0 댓글수 4 조회수 252상세보기 -
감상&비평 사랑을 깨닫는 것 - 김복유 <레아의 노래>를 듣고
*종교적 관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야곱은 날 외면하여도 주님은 날 보아 주신다야곱은 날 무시하여도 주님은 날 들어주신다야곱은 날 떠나갔지만 주님은 다만 안으신다야곱은 날 인정 안 해도 주님은 나만 인정하네Shout of the 유다 내게 행복을 주신 분께Shout of the 유다 나를 사랑한다는 분께Shout of the 유다 나를 좋아하시는 분께Shout of the 유다 유다 유다너는 아주 특별해 아주 많이 특별해사람들이 뭐래도 너는 아주 내게 아주 특별해세상은 널 외면하여도 주님은 널 보아 주신다세상은 널 무시하여도 주님은 널 듣고 안고 껴안아세상은 널 떠나갔지만 주님은 다만 안으신다세상은 널 인정 안 해도 주님은 너만 너만 너만 -<레아의 노래>(부분 삭제) 이 찬양은 성경 중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야곱은 형이 밖에 나간 사이에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대신 받고, 그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한다. 라반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는데 첫째가 레아이고 둘째가 라헬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해서 라반에게 7년을 무보수로 일하고 라헬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7년 후, 라반은 그를 속여 레아를 대신 보낸다. 그리고 결혼 다음 날 아침에 야곱이 그 사실을 알고 따졌을 때,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경우는 없다고 하며 7일을 채우면 라헬도 줄 테니 이후로 7년을 더 일하라고 한다. 그래서 야곱은 그렇게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레아이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했기에, 레아는 결혼 후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첫째 아들부터 셋째 아들을 낳을 때 계속해서 야곱의 사랑을 갈구한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짓는다.첫째의 이름은 ‘르우벤’으로 ‘보라, 아들이라’라는 뜻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리라는 것이다.둘째는 ‘시므온’으로 ‘듣다’라는 뜻이다. 첫째를 낳았음에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자, 자신의 기도를 들으셔서 또 아들을 주셨다고 생각한 것이다.셋째는 ‘레위’고 ‘묶다, 연합하다’라는 뜻이다. ‘이제는 정말 그가 날 사랑하겠지’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런데 넷째인 유다를 낳을 때 레아의 마음이 바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이란 뜻이다. 유다를 낳으며 레아는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했다. 야곱의 사랑에 목말라 그의 사랑을 위해 아들을 낳은 전과 달리,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고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위로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분께 찬양을 드리게 된 것이다. 찬양 <레아의 노래>는 넷째 유다를 낳고 난 후의 레아의 고백에서 나온 찬양이다. 이 찬양의 가사를 보면 레아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외면할 때 나를 보시는 분-모두가 날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을 때 내 말을 들어주고 날 인정하시는 분-누군가가 나를 떠나갈 때 나를 안
작성일 2025-03-22 작성자 가엘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173상세보기 -
감상&비평 이데올로기에 대한 단상
여전히 세상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의 이해는 조금도 진전이 없다.언어가 가지는 가정적인 세계가 확장 되었을 뿐, 과연 그 세계가 현실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지, 현실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여전히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일률적인 일반화를 필요로 하며 인간 개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해서 복잡한 언어의 세계를 구성해 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말하자면 이런 것이다.어떤 물리 엔진을 구현한다했을때에 우리는 어떤 것을 필요로하는가? 우선 그 물리엔진을 돌릴 컴퓨터가, 튜링머신이든 유기체든 필요할 것이며 우리가 지금 까지 발견한 물리법칙을 훨씬 단순화한 행동표가 필요할 것이다. 물리법칙을 그대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컴퓨터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아직까지 TOE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계급 투쟁에 대해서도 다뤄보겠다. 인간 개체를 분류하고 그 행동을 일률화하여 이해하고자 하는것, 그것이 운좋게 들어 맞는 경우가 있더라고 그것은 일시적이며 우연적일 뿐이다. 세계의 이해는 이제 미시세계의 법칙과 환원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전술된 경우에선 사회 법칙은 심리학으로, 심리학은 신경학으로, 신경학은 다시 화학과 미시 물리적인 법칙으로 환원되어서 이해되어야하는 것만이 올바른 접근이다. 이 이외에는 단지 이 세계를 언어로 이해하기 위한 일반화일 뿐이다. 어떤 인간이 프롤레타리아(혹은 그 어떤 특수한 계급이나 이론화된 행동양식을 가진 인간 집단에 속한다)라고 한다면, 그러한 이해는 (당연히) 인위적인 것이다. 각 개체가 완전히 상이하며 그나마도 1차원적이지도 않고 동시에 시간에 따라서도 바뀌며 애초에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것 자체부터 굉장히 오만하며 위험한, 그러나 불가능한 발상을 내포한다. 우리 직전 세기에 저물어 버린 과학처럼(현재의 과학은, 그러니까 최협의의, 가장 근본적이며 더이상 환원되지 못하는 과학은 이미 추후 반박되기 어렵다고 보여지는 상당한 부분이 규명되었으며 또한 동시에 기술적 한계에 다다랐다. 더 이상의 발견은 우리 문명의 카르다쇼프 척도가 유의미하게 증가했을 때야 가능할 것이다) 언어로서 표현되는 거시세계 또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전을 이루어 인류에게 굉장히 유용한 혜택을 주고 있으나 여전히 근본적으로 내포된 문제(거시세계를 카오스 이론에 의해 요구되는 정확도 이상으로 이해하는 능력의 부재)는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듯 하다.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 어떤 행동의 당위에 이르는 알고리듬이며 그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모종의 윤리관또한 갖추어야한다. 이데올로기 간의 이질은 세계를 언어로서 표현되는 세계가 다름뿐만 아니라 인간 개체간의 윤리관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리관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도 모호하고 호소력이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혹자가 기독교적 유신론자라 한다면, 혹자는 유일신의 공회와 그 유일신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일신이 있다 한들, 그가 창조주이며 전지전능한 절대자라
작성일 2025-03-11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52상세보기 -
감상&비평 우공이산-멀리 떨어진 힘으로도 세계를 밀 수 있을까(미완)
이 주제를 두고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었지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문장으로 엮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처음 본문을 쓰고자 다짐했던 날보다 지금의 나는 더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세상이 더 멋지지 않다는 걸 하루 하루 인정해나갈 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불확실한 세상에서 눈을 떠보니 생각보다 지구에는 다정한 마음으로도 강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혐오자와 비관론자는 무수히 많이 모여 있지만, 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라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었던 날보다 더 조심스럽고 단단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고등학교 한문 수행평가 시간의 주제였다. 우공이산을 두고 두 가지 관점으로 글을 쓰기. 우공이산,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듯이다. 첫 번째 관점(A)은 이 성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두 번째 관점(B)은 이 성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A 관점은 이렇다. 을 마주할 때 우리는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단편적인 천장이 그렇게 가로막더라도 나는 우공이산과 같은 뜻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왜냐하면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음이 세상을 바 꿀 것이다'를 믿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불확실함과 어려움 가득한 세상의 벽에 가로막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두 세 문장, 두 세 단어로 이뤄진 편리한 혐오를 마주한다. 인터넷 상에서10초면 이루어지는 '편리한 혐오'에 아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고통받는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고 깎여 분노하는 일 조차도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안 되는 건 과감히 포기하라"고 얘기하 지만 그것은 어떠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서가 아닌 '체념해서'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세상은 바뀌지 않을까? '무모하게'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들은 정말 바보일까? 아 니면 하늘에서 계시를 받은 성인이거나 진정한 지식인일까?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계엄령 이후 광장에 모여서 시위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거리에 나와 응원봉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평소에는 '무모한 짓 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던 내 친구들도 시청 앞으로 갔다. 우리는 알고 있다. 결심의 정도는 각자 달라도, 모두 분노한 것이다. 개인의 영달만 중시하는 것을 넘어 '안 되겠다'고 느꼈기 때문에 뛰쳐나간 것이다.그렇다. 우리는 변화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법의 정의는 언제나 시민보다 한 발짝 느리고, 국가는 사전에 많은 일들을 대비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무모한 사람들이 만든 땅에서, 무모하지 않게,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 되는 건 과감히 포기하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누군가 '산을 옮길 수 없다'고 돌아갈 때, 삽 한 자루를 가지고 걸어가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삽 한 자루 와'우공'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산'했을 때 산을 돌아가던 사람들도
작성일 2025-02-28 작성자 방백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43상세보기 -
감상&비평 연대와 꿈의 기로에서 -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_우스운 전쟁들>
장 뤽 고다르의 유작 2편 중 처음으로 공개되었던 은 다소 급진적이고 정치적이었던 고다르의 ‘영화 행위(Filming)’를 종결짓는 마지막 보루다. 무엇보다, 감동적이다.고다르는 을 만들고 나서 또 하나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제목은 미정의 장편이었지만 프랑스의 소설가 플리스니에의 소설 에 수록된 단편 “샤를로테”를 각색한 영화였다. 그러나 고다르는 늙었고, 내용은 다소 어려웠으며, 아무도 영화를 위해 투자하지 않았다. 영화는 여러번 제작이 무산되었다. 마지막까지 고다르의 곁을 지켰던 그의 조수 파브리스 아가리노에 의하면, 그즈음 고다르는 자신 스스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다르는 영화 제작하기를 관뒀다. 대신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모아둔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 자료들을 조합해두었던 자료집을 재구성해서 전자문서로 변환했고, 이 후 그 곳에 나레이션을 입히고 간단한 편집작업을 거쳤다. 그러자 그 자료들은 고다르가 원하던 영화의 형태로 얼추 뼈대를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이다. 이건 고다르가 원했던 완전한 형태의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자료 콜라주를 영화화시킨 것이므로 피상적인 ‘예고편’ 정도에 불과했다. 제목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인 까닭은 그래서이다.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다르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듯, 영화의 도입부에서 “어두운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없더라면 더욱이 어렵다.(It’s hard to find a black cat in a dark room, especially if it’s not there.)” 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고다르는 본작의 핵심을 알려주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 후 다음과 같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등장한다. (영화 이미지)A. ‘우리들의 전쟁은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의 이미지와 같다. 그곳에는 두개의 이미지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녀와 나. 그녀 다음에 내가 있지만, 난 그녀를 만난 적 없다. 그저 인지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Our war, It's like...an image that comes from far away. There are two of them, side by side. next to her is me. I’ve never seen her before.)’고다르는 위 문장을 통해 이미지들에게 ‘그녀와 나’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이미지들은 비로소 탈-이미지화되어서,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게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된다. 고다르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시작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그다음 영화는 여러 이미지(영혼)들의 배열과 조합을 보여주고, 나레이션으로 전쟁에 대한 참상을 묘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8번의 음악이 등장하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와 샹탈 아커만의 사진이 보인다. 고다
작성일 2025-02-28 작성자 화자 좋아요 1 댓글수 2 조회수 308상세보기 -
감상&비평 내 뒤에 있는 진짜 내 모습 (영화 마스크를 보고)
최근 나는 넷플릭스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게 내 예비 고3 방학의 낙이었다.그러다가 우연히 넷플릭스에 있는 ‘마스크’라는 영화를 발견하였다.**스포주의**마스크라는 영화는 나온 지 20년이 넘은 1990년대에 나온 오래된 작품이다.주인공은 은행에서 고객들과 상담하는 일을 하는데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지만, 그는 굉장히 소심하여 뭐라 말을 못 하고 자존감이 굉장히 낮아서 화가 나도 그 대상 앞에서 욕을 하지 못하고 뒤에서 욕을 하는 편이다.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마스크 하나를 주운 주인공은 호기심에 한번 마스크를 써보게 되었고그 순간 주인공은 갑자기 변하고 말았다.소심한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 말도 못 하던 주인공이 이제는 앞에서 욕을 다하고 좋아하던 여인과 벌벌 떨며 이야기하던 주인공이 좋아하던 여자와 춤도 추고 데이트도 하면서 마스크를 쓰기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든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했다.하지만 주인공도 계속 마스크 뒤에서 숨어서만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마지막 난동이 일어나고 마스크를 벗은 뒤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날리게 된다.주인공은 마스크를 강가에 버리며 이제는 자기 모습 그대로 그녀와 행복하게 살 거라고 다짐한다.이 영화는 그저 코미디 영화에 그치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얻을 점이 아주 많았다고 생각한다.나는 19년을 살아가며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학교생활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며 지내는데 나조차도 가면, 마스크를 쓰고 있는 느낌이 든다.살아가다 보면 나도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이 삶이 내 삶이 맞는지 고민이 들기 시작한다.‘학교에서는 아주 조용하고 친구들과 잘 친하지 않은 모습이라면 다양한 활동을 할 때는 나이 가리지 않고 성별 가리지 않고 모두와 친하고 재밌게 노는 모습이고 가족한테는 굉장히 차갑고 자주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심지어 학교 친구와 활동 친구를 만나서 내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면서 나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한다.캠프에서도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나도 항상 어떤 내가 진짜 나의 모습일까 고민하며 벗어볼까 생각은 하지만 쉽게 벗지 못하고 있다.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각자 자신이 보여주지 않는 숨겨놓은 가면, 마스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자신의 모습이 다양하다고 해서 욕을 하는 것이 아니다.그저 자신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원래 모습을 버리지 말고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자신의 뒤에 가려진 진짜 모습 친구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진짜 나의 모습들을 언젠가는 벗어내고 다가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처음에는 몰랐지만 주인공이 마스크를 쓰고 다가온 것이라는 점을 안 여주인공처럼 언젠가 살아가다보면 내가 열심히 가면을 숨기고 살아가다가 누군가에게는 들키게 되어있다.그 점을 들키게 된다면 친구들은 많은 혼란을 느낄 것이고 배신감이 강하게 들것이다.’가면은 나를 숨기기에 아주 좋은 안식처이자 도구이다.하지만 그 가면
작성일 2025-02-28 작성자 역사 좋앙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89상세보기 -
감상&비평 여성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섹스 어필과 노출할 자유에 대한 단상월장원 선정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첨부된 이미지가 정말 중요한 글입니다. 파일 첨부가 안되어서 블로그로 연결된 링크를 달아 두었으니 꼭 이미지와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ㅡ최근 전세계에서는, ‘여성의 노출’이라는 주제가 계속해서 화제에 오르고 있다.202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비앙카 센소리는, 전신을 꽁꽁 싸맨 칸예 웨스트 옆에서 안이 모두 비치는 망사로 된 옷을 입은 채 기자들 앞에 섰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시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여성을 향한 전쟁을 멈춰라’는 구호를 가지고 상반신을 탈의한 여성 시위가 이루어졌다.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성적 외모 강박을 주제로 한 ‘서브스턴스’ 영화가 한국에서 큰 흥행을 이루었고, 일본에서는 여성을 성적대상화한 라면 광고에, 캐릭터를 남성으로 바꾸어 풍자하는 등의 추세가 번지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이, 다 지나가지도 않은 이번달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여성에게 성범죄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성폭행 피해자에게 ‘옷을 왜 그렇게 입었느냐’를 핑계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흔하다. 그녀가 입은 옷, 그녀가 취한 태도, 그녀가 지나가듯이 한 한 마디로 인해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의 가해자는 너무나도 손쉽게 감형을 받는다. 사회는 범죄를 저지른 남성보다 범죄를 당한 여성에게서 먼저 잘잘못을 따진다. 사회는 단 한 번도, 여성을 위해 굴러간 적이 없다. 그것은 오랫동안 남성을 ‘인류(man)’로 기르고, 여성을 ‘여자’로 사육해왔다 며칠 전부터 X(구 트위터)에서는 연예인의 신곡 뮤직 비디오에서부터 시작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여자가 당당히 노출이 과한 옷을 입었을 때, 그것은 여성주의를 후퇴시키는 ‘섹스어필’인가, 아니면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노출할 자유‘인가?여론이 쏟아졌다 뒤바뀌고 서로의 다양한 발언이 정제되지 않은 채 흘러나오는 sns속에서, 나는 많은 고민을 했고, 이 글을 쓴다. 나는 솔직히 말해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노출에 회의적이다. 앞에서 말한 시위를 위한 노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가 곧 ‘상품’이 되고, ’상품의 이미지‘가 유행이 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유행을 오랫동안 가꾸어 여성을 세뇌시켜온 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말이다. 여자 아이는 어릴 적부터 많은 것들을 보고 자란다. 여자에게만 주어지는 꾸밈노동, 면역력에 해가 될 정도로 밥을 줄이면서 얻는 다이어트 강박뿐만이 다가 아니다. 가족 손을 잡고 영화관을 간 소녀들은 아울렛, 지하철 쇼윈도에 전시된 형형 색색의 속옷을 본다. 누가 보아도 과하게 성적 어필을 하는 프릴, 무늬, 리본은 아이들의 뇌에 강하게 새겨지고 그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어린이용, 청소년용 팬티와 브레지어에 달려있는 작은 리본과 프릴. 조금만 얇은 여름 옷을 입어도 리본이 거슬려 불편하다. 그러나 내 남동생의 속옷에는 그런 부속품이 없다. 과한 색상 또한 없다. 신체 특성에 맞추지 않아 딱 붙는 사이즈도 없고, 실제로 숨통을 조여오는 후크도 없다. 가슴 크기를 키우기 위
작성일 2025-02-25 작성자 방백 좋아요 0 댓글수 6 조회수 630상세보기 -
감상&비평 소수자와 함께 즐거운 행진을: 신디 로퍼 <Girls Just Wanna Have Fun>을 듣고
즐거움이란 단순히 즐겁기만 한 감정이 아니다. 이는 관념적이기만 한 감정도 아닌 구체적인 대상이다.즐거움을 단순히 왔다가 사라지곤 하는 무색무취의 감정으로 대하기보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긍정하고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감정에 쉽게 이끌리고 매몰되기보다, 주체적으로 감정을 터득하고 활용하기 때문이다. 가수는 음악과 말을 통해 감정을 노래한다. 그 과정에서 감정을 보편적인 메시지를 동봉해 전달하기도 하는 한편, 감정에 새롭고 낯선 의미를 덧대기도 한다.록 밴드 퀸은 를 통해 방탕하고 쾌락주의적인 가사와 경쾌한 로큰롤 반주를 통해 유희적인 삶, 즉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그렸고, 존 레논은 의 진솔하고 관조적인 가사를 통해 현재의 삶을 즐기는 것을 강조했다.퀸과 존 레논은 삶을 유희적 또는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보편적인 태도를 통해 즐거움을 노래했다.그러나 이들에게 즐거움이란 단순한 관념적인 무언가이자 인간의 여러 감정 중 하나가 아닌, 삶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지탱하는 구체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즐거움을 연금술사처럼 다루고 삶과 음악에 적극적으로 접목했다. 그리고 여기 즐거움을 대상적일 뿐 아니라 새롭게 바라본 가수가 있다. 신디 로퍼는 미국의 80년대를 풍미한 팝 가수이자 사회활동가이다. 그의 1983년작 앨범 에는 제목처럼 정말 ‘유별난’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하나인 은 특유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시선으로 긍정적인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노래이다. ‘즐거움‘에 대한 그의 생각은 곡의 분위기와 가사, 그리고 뮤직비디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즐거움‘을 기존의 남성만의 전유물로 보기보다는 여성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며 여성에게 ’즐거움‘을 쟁취의 대상으로 보도록 유도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보다는 앞서 언급한 ’퀸’의 노래처럼 꽤 유희적이고 신나는 분위기를 사용한다. 또한, 늦게까지 파티를 하고는 부모님께 꾸지람을 듣는 말괄량이 소녀를 가사와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의도를 적절하게 전달한다. 노래는 발랄한 전자음 글리산도로 시작하여 중간의 신디사이저 솔로를 거쳐 떼창의 페이드 아웃으로 끝이 난다. 경쾌한 리듬에 발을 맞추는 청량한 기타 리프와 120BPM의 율동적이고 신나는 드럼 비트, 디스코 음악을 연상시키는 신디사이저와 베이스 음이 주를 이루며, 처음부터 끝까지 밝고 신나는 분위기와 장조 코드를 따른다. 신디 로퍼가 중간중간 던지는 애드리브도 신나는 분위기를 더한다. 즐겁게 춤을 추며 ‘아침 해가 뜨고서야 집에 들어온’ 주인공에게 엄마는 ‘언제 정신 차리고 살 거냐’며 꾸중하고, 주인공은 엄마에게 ‘우리는 행운아가 아니’고 ‘여자들은 그저 즐기고 싶다’며 항변한다.‘한밤중’ 전화기를 잡으려던 주인공에게 아빠는 ‘뭐 해먹고 살 거냐’며 잔소리를 하고, 주인공은 ‘아빠는 최고이지만, 여자들은 그저 즐기고 싶다’며 눈을 세모나게 뜨고 아빠를 제압하고는 친구들과 전화를 한다.주인공과 통화하는 친구들은 벽에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붙이고 머리에
작성일 2025-02-22 작성자 손님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66상세보기 -
감상&비평 눈을 감으며 - 시네마 소나타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신작《눈을 감으며(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후반부에는, 영화를 보는 서로 다른 눈들이 있다. (한글 제목의 정확한 표기는 이지만, 영화의 원제인 ‘Cerrar los ojos'는 동사이므로, 감독의 의도와 한글 특성을 반영하여 서두에서만 ‘눈을 감으며'라고 올바르게 표기한다.) * 속 후반부, 영화를 보는 서로다른 눈들 이들은 기억 상실증에 걸린 유명배우 홀리오가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들을 보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염원 아래, 하나의 기적을 바라며 모였다. 눈은 스크린 위에서 영사되고 있는 오색 빛들을 쫒고, 그 빛들 끝에서 스크린을 향해 바삐 움직인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눈은 어떤가.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홀리오가 기억을 되찾기를 바라며 영화라는 기적을 염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물음이 우리를 덮칠 때, 스크린을 향하던 그들의 눈은 우리에게 당도한다. 당신들은 홀리오가 자신의 기억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다시 말해, 당신은 영화의 기적을 믿는가. 우릴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눈빛에 담겨있는 건 바로 그러한 질문이다.그 물음 속에서, 우리를 응시하던 홀리오는 무언가를 득도한 듯한 눈빛으로 지그시 눈을 감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눈을 감는다는 것. 빅토르 에리세에게 눈을 감는 행위를 물어볼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건, 빅토르 에리세의 또 다른 걸작 속 한 장면이다. 어린 소녀 ‘아나’는 언니의 말마따나 프랑켄슈타인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감지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 속 아나 토렌트가 눈을 감는다눈앞이 캄캄해지고, 주변의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불어오고, 곤두선 감각에 알 수 없는 것들이 자연스레 감지된다. 다만 이건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감각적인 것이며, 또한 추상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언제라도 우리 곁에서 사라질 듯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함이라는 감각이야말로 인간의 상상을 자극하고 그 형체 없는 어떤 영(英)의 형(形)을 더듬더듬 감지할 수 있도록 하는 요소는 아닐까. 흔히들 말해지는 영화에서의 영성이란 바로 이런 불완전함의 지속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렇기에 눈을 감는다는 행위에는 단지 감각의 예민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마주하려는 감각의 유속성이 담겨있다. 그곳에서 이미지를 생성하며 시각을 자극하는 본질을 지닌 영화는 비로소 ‘보여지는 것’ 이상의 기적을 행해낼 수 있다. 속 ‘아나’가 눈을 감으며 감지한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영혼의 형상이다. 그러나 이런 영화의 기적은, ( 속 낡은 극장을 운영하는 영사기사 맥스의 말을 빌려보자면,) 드레이어의 죽음 이후 영화사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드레이어와 기적 여기서 드레이어가 일구어내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과 불안 속에서 그 무엇보다 단단한 믿음을 지니도록 하는 것으로, 인물과 사물을 시간에 가두어놓고 그들의 파편적인 인생을 롱테이크로 찍으며 관객 스스로 상황과 진실을 납득하도록 만드는 형식을 가지고 찍었던 영화들, 가령 증오하던 노파가 죽자 마녀로 몰
작성일 2025-02-08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533상세보기 -
감상&비평 함께 그리고 소중하게 성장하는 인연-애니메이션<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을 보고
학교 밖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것은 또래와의 만남이 적어지는 일이었다. 10대 시절 학교라는 공간은 배움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친구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공간에서는 매일 만남이 생기고 1년에 가끔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 이런 학교라는 공간이 제외된 10대를 산다는 것은 친구와의 만남이 적어지고 친구와의 이별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 역시 학교를 나와서 많은 친구와 작별 해야했다. 그래서 지난 몇 달간 이별이라는 우울 속에서 살아갔다. 이 우울은 단순 헤어짐의 아쉬움이 아닌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과 외로움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감정은 여러 인연과의 작별과 재회를 통해 하나씩 사그라들었다. 학교를 나온 후 제일 기억에 남는 재회는 이라는 내 수필에서 등장하는 S와 K와의 만남이다. S와 나는 중학교 동창이면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래서 다시 만날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해 11월부터 S는 고등 2학년 내신과 수능을 대비하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멈췄다. 또한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K도 그해 12월 초까지 시험기간이라 나와의 만남과 소통을 줄였다. 그러나 이 둘은 나와 우연을 배경으로 다시 만났다. K는 내가 우연히 보낸 카톡으로 다시 만났고 S는 25년 구정에 할머니댁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는 이로 인연을 통한 만남과 이별의 우연성과 연결됨의 힘을 느꼈다. 이런 힘을 믿으면서 찰리 맥커시의 동화 원작인 애니메이션 을 시청했다. 위 애니메이션은 제 95회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25년도에 되어서야 위 작품을 시청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단편 애니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아감과 사라짐에 대한 주제로 시와 소설을 쓰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던 중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의 시작은 설원에 홀로 있는 소년과 두더지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소년은 길을 잃었고 두더지는 배가 고팠다. 배고픈 그의 눈에는 나무가 케이크로 보였다. 두더지는 실망했지만, 소년은 그를 다독이며 나무 위에 올라가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의 주제는 꿈으로 소년은 "친절한 사람"이라 답을 했다. 그러나 두더지는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의 말에 "친절함을 이기는 것은 없지"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후 배고픈 여우가 나타나 나무 위에 있는 그들을 먹으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포기한 여우는 다른 곳에 가던 중 덫에 잡혀 움직이지 못했다. 이대로 있으면 꼼짝 못 하고 죽을 여우였지만 두더지가 그를 도움으로 여우는 살 수 있었다. 두더지는 친절을 시행한 자였다. 그래서 그는 속박에서 벗어난 여우의 굶주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소년과 집을 찾다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여우의 도움을 받아 살 수 있었다. 이는 친절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 했다. 뒤 내용을 더 이야기하면 소년과 두더지 그리고 여우는 집을 찾으러 가던 중 숲속에서 말을 만나고 신나게 집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던 중 그들이 너무 흥분해서
작성일 2025-01-31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435상세보기 -
감상&비평 산타할아버지는 왜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가?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마음껏 울어본 적 있는가? 동요 가사처럼 우리는 어릴 때부터 눈물을 부정적으로 인식해왔다. 현대 사회는 감정의 통제를 미덕으로 여긴다. 공적 장소에서 우는 행위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고, 억눌린 감정은 마음 속에 갇힌다. 한강의 는 눈물의 억압과 해방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작품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며, 동화라는 형식을 통해 현대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드러냈는지 분석할 것이다. 세 인물을 통해 바라본 감정의 억압 이 책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먼저 보통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는 눈물을 종일 흘리는 ‘눈물단지’가 있다. 그는 우리의 유년기를 상징한다. 감각이 예민하고 자아 인식이 발달하면서 어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눈물을 흘리는 존재다. 눈물을 담은 병을 상자에 넣어 들고 다니는 ‘아저씨’는 눈물을 사고파는 인물이다. 그는 눈물을 모아 상자에 담고 다니며, 이는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그려낸다. 그런 그에게 전 재산을 줘서라도 눈물을 사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는 한 방울의 눈물이 간절한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내가 떠났을 때도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감정을 극도로 억눌러 온 인물로, 그의 이야기를 통해 감정 통제의 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저씨는 순수한 눈물을 사기 위해 이 마을에 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물단지는 아저씨 앞에서만큼은 눈물을 흘릴 수 없다. 평소라면 하염없이 흘렸을 눈물이 멈춰버린 것이다. 그러는 사이 아저씨는 약속된 시간이 다가와 떠나야만 한다. 그러자 눈물단지는 아저씨를 따라 나선다. 둘은 함께 할아버지를 만난다. 할아버지는 기어코 전 재산을 내놓으며 눈물을 사겠다고 한다. 얼어붙은 감정을 녹이기 위해 눈물을 마신 그는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낸다. 그 순간, 그의 그림자 눈물도 함께 울음을 터뜨린다. 아저씨는 말한다. “그림자도 눈물을 흘린단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없을 뿐이야.” 그는 그림자눈물 한 방울을 꺼내 손전등을 비춘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그림자눈물샘’이 드러난다. “눈물의 입자가 너무 고와서 곧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모를 뿐이야. 어떤 사람들은 눈으로 흘리는 눈물보다 그림자가 흘리는 눈물이 더 많단다. ‘울면 안 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사람들, 감정을 삼키며 살아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그림자는 눈물로 가득 차 있어.” 그림자 눈물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다. 이는 억눌린 감정과 무의식 속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직접적인 울음으로 표출되지 않지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감정의 그림자다.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린 눈물단지는 아저씨에게 묻는다. “내 눈물은 순수한 눈물이었나요?” 그러자 아저씨는 더 많은 빛깔이 필요하다고 답한다. 분노, 부끄러움, 더러움까지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때, 눈물 속 감정의 결이 더욱 풍부해지고, 그제야
작성일 2025-01-30 작성자 molae 좋아요 1 댓글수 2 조회수 419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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